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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13
성공이 아닌 섬김이다
제 72주년 광복절

미국 남장로교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자 선교사

제 72주년 광복절을 맞아 미국 남장로교선교부의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32세에 조선으로 와서 1934년 54세로 소천하기까지 22년 동안 일제점령기에 당시 한국의 궁핍한 지역으로 의료혜택을 받지 못했던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간호선교사로 활동을 펼친 서서평 선교사를 소개한다.(편집부)


서서평 선교사는 미국 남장로교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선교사 7인 중 유일한 한국 파견선교사다.
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조선 백성들… 나라를 팔아넘긴 자들은 자손 대대로 풍요롭게 살 길이 열리는 순간이었지만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던 조선백성들에게는 더욱 피폐한 삶이 있을 뿐이었다.

서서평 선교사(본명 : 엘리자베스 쉐핑 Elisabeth Johanna Shepping)는 1912년 조선으로 왔다. 그녀는 간호 선교사로 새로운 삶을 맞는 기대감으로 조선에 왔지만 그녀의 눈에는 힘없는 백성, 가난한 서민, 멸시받는 거지와 따돌림받는 나병 환자 등이 그득한 조선의 현실이 참담하기만 했다.

푸른 눈을 지닌 독일계 미국인이었던 쉐핑은 조선에 오며 서서평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조선어를 하고 한복을 입고 고무신을 신으며 보리밥과 된장국을 먹는 조선 사람이 되었다.
선교사 겸 간호사로 조선에 파견되었지만 서서평으로 살며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는 것을 보면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도와주었고, 한국 간호학계의 기틀을 만들기도 했다.
처음 맡은 일은 전라도에서 간호사 양성과 기독교 선교활동이었고, 서울의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그러나 3.1운동이 터지자 조선인들을 치료해 주고 독립운동가들의 옥바라지를 해주었다는 이유로 일본은 서서평 선교사의 서울 활동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1920년대에는 다시 전라도로 내려가 봉사활동을 했다. 방문 간호와 공중위생에 힘썼으며 인신매매나 공창폐지운동에도 참여했다. 길을 가다가도 머리가 지저분한 여성을 보면 손수 빗질해주고, 속옷이 보이거나 가슴을 내놓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면 옷매무시를 고쳐주었다고 한다.

또한 노예처럼 살아가며 인신매매를 당하던 소녀들을 구출해 교육하고 사회봉사를 할 수 있는 인물로 키워내며 14명의 아이를 입양해 키우며 나병 환자의 아이들을 입양하도록 주변에 알리기도 했다.

서서평은 한국 나병 환자에게도 큰 도움을 주었다. 조선 시대의 나병 환자는 병의 전염성 때문에 따돌림받고 멸시당했다. 서서평이 만든 나병 환자 시설도 주변 주민들의 반발 때문에 시외로 옮겨 새로 만들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서서평 선교사를 푸른 눈의 어머니라고 했다.
당시 선교사는 생활비로 3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중에서 서서평 선교사가 자신을 위해 쓴 돈이 겨우 10전 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불우한 조선인을 위해 사용하며 ‘이일학교’와 ‘조선간호협회’를 세웠다.

서서평은 삶을 포기한 환자들을 보살피고 보듬어 새로운 희망을 품게 도왔다. 그녀가 목사님과 서울에 상경할 때는 나병 환자들과 모여서 대행진을 벌인 적도 있다. 이로 인해 일제총독부는 결국 소록도에 나병 환자 단독시설을 허락하고 지금의 국유지인 전남 소록도가 있게 되었다.

서서평은 선교사이기도 했기에 조선인들에게 성경의 출애굽기를 가르치며 해방의 꿈을 가지도록 도왔다. 자신의 월급을 쪼개서 운영비를 마련하며 시작한 이 사업은 한국의 문맹 퇴치에도 많은 공헌을 했다.

또한 1923년엔 조선간호부회를 조직했다. 국제간호협의회(ICN)에 가입하려고 노력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이 단체는 지금의 한국 간호협회의 모태가 되었다.
1922년 설립된 이일학교(Neel Bible college)는 처음엔 학대받는 여성들, 배울 기회를 못 가진 여성들을 계몽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이후 미국인 친구 로이스 니일(Lois Neel)의 후원을 얻어 그의 이름을 따 정식으로 지은 것이 이일학교로 지금의 한일장신대학교이다.

“이번 여행에서 500명 넘는 조선여성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열 명도 안 됐습니다. 조선 여성들은 ‘돼지 할머니’ ‘개똥 엄마’ ‘큰년’ ‘작은년’ 등으로 불립니다. 남편에게 노예처럼 복종하고 집안일을 도맡아 하면서도, 아들을 못 낳는다고 소박맞고, 남편의 외도로 쫓겨나고, 가난하다는 이유로 팔려 다닙니다. 이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한글을 깨우쳐주는 것이 제 가장 큰 기쁨 중 하나입니다.”(1921년 서서평선교사가 내쉬빌 선교부에 보낸 편지)

일제강점기 초기만 해도 여성의 지위는 매우 낮았으며 힘없는 계층의 여자들은 성매매에 희생되는 경우가 꽤 있었다. 서서평 선교사는 이름도 없이 살아가는 조선 여인들의 인권을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부인이면 ‘대전댁’, 어리면 ‘큰 년’ ‘작은 년’ 같은 명칭을 이름 대신 불리며 자신의 인격이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지도 못하고 살고 있는 조선 여성들을 보며 서서평 선교사는 조선 여성의 교육을 절감했다.

서서평은 1934년 만성 풍토병과 과로로 숨졌다. 그녀가 남긴 것은 담요 반 쪽, 동전(銅錢) 7전(錢), 그리고 강냉이 2홉, 그리고 담요 반 장이었다. 그나마 있던 담요 한 장마저도 길거리의 거지를 위해 반을 잘라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서평의 장례식에는 도움을 받은 수많은 이들이 찾아와서 서서평 선교사를 어머니라 부르며 통곡했다. 유언에 따라 시신도 의학연구용으로 기증되었다.
평생을 척박한 조선과 조선 여성을 위해 살았던 서서평 선교사, 무명 베옷과 고무신 차림에 보리밥과 된장국을 먹는 푸른 눈의 선교사 서서평은 조선인처럼 산 것이 아니라 완전한 조선인으로 산 것이다.

서서평 선교사의 침대 머리맡에 적힌 “성공이 아니라 섬김이다"(Not Success But Service)“라는 문구는 이기적인 행복만을 쫓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정리 : 허 숙 권사(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