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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4
소위 관상기도에 대한 진단과 대안
2018 신년 기획 기사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단과 사이비가 판을 치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지 않으신 비본질적인 기독교 프로그램들이 횡행하는 이 때, 우리 성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에 근거하여 미혹하는 영들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아래는 관상기도에 관한 글이며 필자의 허락을 받아 요약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주)


성도의 기도 가운데는 부르짖는 기도에 비하여 조용히 묵상하는 기도에 대한 요청이 있을 수 있다. 또한 하늘을 향하여 달라고만 하는 기도에 비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도 있을 수 있다. 기도에 대해서도 우리가 해 온 관행을 넘어 성경적인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다.
그동안 우리 주변에 흔히 있어 온 기도 행태는 한편으로는 부르짖는 기도요, 다른 한편으로는 달라는 기도였다. '주여!' 삼창을 외치고 일제히 목소리를 높여 '주시옵소서'라고 구한다. 기도는 이렇게 해야 했고 이렇게 하지 않는 기도는 뭔가 간절함이 없는 듯이 여겨졌었다.
반드시 부르짖는 기도만 참된 기도일까? 조용히 묵상하듯이 기도할 수는 없을까?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반드시 달라고 해야만 기도인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할 수는 없을까? 성경은 부르짖는 기도와 아울러 조용히 묵상하듯 하는 기도도 아울러 지지하며, 달라고 하는 기도와 아울러 주의 뜻을 헤아리는 기도도 아울러 지지한다.

1. 소위 '관상기도'에 대한 변호
우리 주위에 비교적 건전하다고 여겨지는 분들 가운데 관상기도를 주창하면서 관상기도가 바로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고 말하는데 과연 그런가?
관상기도는 하나님을 집중적으로 바라보는 '바라봄'의 기도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마음의 기도라는 설명이다. 가톨릭적인 전통에 따른 기도형태지만 어떤 목사는 종교개혁 이전에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구분이 무의미했기 때문에 관상기도를 굳이 가톨릭의 기도라고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중보기도가 영적 전쟁과 같다면 관상기도는 영적 안식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전쟁만 할 수 없고 쉼이 필요하듯 기도에도 하나님 안에서 안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통성기도를 많이 하는 한국 교회는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의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하나님을 깊이 만나기 위해서는 영혼의 고요함과 깊은 침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유진 피터슨(관상적 목회자)을 인용하면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해야 한다고 이사야서 30장 15절에 근거해 책망한다. 또한 시편을 제시하는데, 시편에는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고 한다. 시 46:10에서 '가만히 있어'의 영어 포현은 'be silent'로서 침묵가운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중요한 말씀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엘리야의 경우를 예시하기도 한다. 엘리야가 호렙산 동굴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왕상 19:1-18)는 내용도 관상기도를 지지하는 성경적 증거본문으로 제시한다.

2. 관상기도에 대한 비판
관상기도에 날을 세우고 비판을 가하고 있는 목사들중 어떤 이는 관상기도는 '신비주의 자아 최면 형상'이다. 이것은 이교도 명상 도입에 기독교형의 탈을 쓴 비성경적 방법이며, 복음과 상관없는 것이며, 관상기도수련회는 주로 미국의 종교다원주의 뉴에이지적 수도원에서 열리며, 관상기도를 멘토하였던 영성가들이 과연 누구인지를 우리가 안다면, 발견한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관상기도는 진리의 사각지대, 관상기도를 즐기는 님들에게, 김삼 목사 저).

한국교회에 관상기도를 도입한 모 목사를 영적으로 지도한 문제의 살렘 인스티튜트는 종파를 막론하고 성직자들과 신도들의 관상영성을 보급해온 단체다. 표면상 그럴듯한 기독교 단체 같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종파'만이 아닌 '종교'의 경계를 자유롭게 초월한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관상기도가 동양적 신비주의 사상과 가톨릭 신비주의를 물려받은 것이라는 비판도 있다. 또한 미국 튤립신학교의 K교수도 관상기도에 대하여 꾸준히 비판의 글을 올리고 있다. 그에 의하면 항상 이상한 교리는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되어 전국에 퍼진다고 한다. 요즘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엔젤리스 근처 아주사 대학의 리차드 포스터 목사를 비롯한 많은 목사들이 정통기독교와는 다른 소위 명상영성 운동을 권장하고 있어서 교계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고 한다. 이들은 미국 내에서만 활동하는 게 아니고 전 세계에 다니면서 많은 성도들에게 이런 빗나간 영성운동을 전하고 있다고 한다.
관상기도를 하는 이들은 시편 46;10, 왕상 19:1-8, 마 5:3, 요 14:10, 20, 17:21, 롬 8;26-28, 계 3;20 등의 말씀을 제시하며 성경 속에서의 관상기도를 말한다. 그러나 시편 46:10을 보면 기도는 하나님께 의지하고 안식하라는 것이지 기도로 조용히 관상하라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없다. 설령 기도하라는 말이 나오면서 소리를 내지 말고 조용히 관상하라고 한다 할지라도 역시 성경의 전후 문맥에서 그 의미를 살펴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반문하며 본문은 구원과 관계된 것이지 관상기도와 연결된 흔적이 없다.
왕상 19:1-18에서 '세미하다'는 것은 내적으로 은밀하게 나타나시는 하나님, 내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인데, '세미한'이란 말은 물리적인 외부의 것들이 조용하다는 것이지 엘리야가 조용히 관상기도를 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마 5:3의 제시에 대해서도 분문의 빈 마음이라는 것은 탐욕, 정욕, 물욕 등의 생각을 갖지 않고 정결한 심령으로 사는 이미 구원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말씀이며,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임을 겸손히 선언하고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만을 구하는 구원 받은 자로서의 겸비한 모습으로 성령을 받은 상태를 말한다(행 2:28).
요 14:10, 20, 17:21의 제시에 대해서도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을 동거동행으로 해석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한다는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또한 롬 8:26-28의 제시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탄식함은 죄 때문에 죄로 얼룩진 인간들을 안타까워하시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지혜의 본질을 잃어버린 지구촌의 상태를 탄식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상기도의 의미를 끼워 삽입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해석은 참으로 황당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계 3:20에서 주님과의 연합의 방법이 침묵이라는 것은 관상가들의 자의적 해석이다. 결국 지금까지 관상기도 주창자의 성경인용과 다른 곳에서의 실체적 행위를 볼 때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본질을 떠난 것이다. 관상기도는 침묵기도에서 파생된 새로운 양태의 이방 종교의 인본주의적 기도 형태이다. 침묵만 하려 들고, 거기에 인도의 명상과 만트라(주문)식으로 짧은 내용을 반복하여 중언부언하는 것은 분명 이교도의 명상에 말씀 몇 구절을 얹어 놓은 것으로 초월적 명상행위와 그 차이가 없는 인본주의, 신비주의, 신영지주의, 뉴에이지로서 장차 종교다원주의와 맥을 같이 하게 되는 비성경적 흐름을 막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다음주 계속(편집부)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