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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4
<순례자 224> 새해엔 새롭게 된 삶의 차원(次元)을 확장시켜야!

새해가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이 한 해 동안 새사람 된 우리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한다. 낡은 정치질서와 불완전하고 소름끼치는 불의로 가득 채워진 세상에서 형식과 표면적 경건만을 내세우는 예루살렘 도성을 생각하면서 기도하던 사도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하고 아름답고, 거룩한,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을 환상으로 보게 된다. 그 새예루살렘은 안전하고 충분하며 균형잡힌 고귀한 성으로 묘사되었다. 새예루살렘 성은 실은 그곳에서 살게 될 성도의 이상적 인간상을 보여주기도 한 것이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인간들은 불완전하여, 고민해야 할 약점을 갖고 있다. 위대한 인물이라 불리우는 이도 항상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붙여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형편인 것이다. 나아만은 위대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둥병자였다. 희랍은 예술인과 철학자를 많이 가진 나라였다. 그러나 노예제도의 기초 위에 세워졌던 귀족정치를 집행한 수치를 갖고 있다. 위대한 문명과 산업혁명의 유산을 간직한 서양은 문명이 낳은 죄악의 씨들이 많이 뿌려졌다. 인간이 완전해지려면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같은”(계21:6) 새예루살렘과 같아야 한다. 인생의 삶은 결국 정삼각형과 같아서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조화있게 발달되어야 완전한 새예루살렘의 시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새롭게 된다는 말은 헬라어로 와 라는 두 단어가 있으나 전자는 시간적, 후자는 공간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인데, 그것이 시간적이든 공간적이든 “새롭게 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시다”라고 성경은 선언한다. 그리스도만이 현재도 과거도 심지어 미래까지도, 하늘과 땅도, 예루살렘도, 언약, 계명도, 이름도, 생명도, 노래도 새롭게 하신다. 새롭다는 말은 변화를 의미한다. 좋게 변하는 것이어야지 나쁘게 변하는 것은 새 것이 아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외형적 변화를 말하나 내 속사람의 변화가 먼저 있어야 신천신지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라고 가르친다. 정권이 바뀌고, 국가의 체제가 변하고, 새 옷을 입고, 새 달력을 걸었다고 새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나를 변화시켜 주시고, 변화된 내 가치관과 새로워진 영적 눈을 갖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인다. 그리스도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의 백성되어 자신의 인생의 길이를 확장시켜야 한다. 우리는 타인을 적당히 사랑할 수 있기 전에 자신을 적당히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는 문자적이고 형식적인 옛 계명이 아닌 영적이고 새로운 동기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그 새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이 새로운 세계에서 사는 사람이다.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노동에는 존엄성과 중요성이 있다. 청소부의 직업을 가진 이가, 베토벤이 작곡을 하듯, 셰익스피어가 시를 쓰듯, 정성껏 마당을 쓸고 쓰레기를 치울 수 있다면 그 인생의 길이는 확장되어 질 것이다. 인생의 너비 즉 타인의 복리를 위한 외연적(外延的) 관심을 넓혀야 한다. 폭이 없는 길이는 흐르지 못하고 고여만 있는 물과 같아서 생명도 신선미도 없다. 창조적이고 뜻있는 삶이란 우리의 자기중심적 관심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관심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내가 목말랐을 때 마실 물을 주었고, 헐벗었을 때 입을 옷을 주었고, 옥에 갇혔을 때 찾아 주었다” 하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넓이의 차원을 확장시킬 필요를 말씀하신 것이다. 내적 힘을 충분히 발육시킨 사람은 인도주의자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모든 실재의 근원인 그 영원한 존재에 대하여는 무지한 자요 배신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위로 하나님께 향한 신앙의 차원을 말한다. 어떤 이들은 부패한 자기 양심을 하나님으로 믿고 산다. 야스퍼스는 신(神)을 퇴위시키고 인간이 신의 자리에 군림할 것을 외쳤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외치면서 인간적이기를 원했다. 사르트르는 신과 인간관계는 끝이 났다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경제적 생산력을 가지고 인간사회와 역사를 설명한다. 현대과학은 합리적, 보편적, 논리적 사고를 강조했고 쾌락주의, 유물주의자들은 가견적 세계만 관심을 갖고 감각주의의 규범을 갖고 산다. 하나님없는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그러나 완전하고 참된 삶이란 길이와 너비와 높이의 차원을 바르게 확장시켜야 새예루살렘 즉 신천신지(新天新地)를 맞게 될 것이다.



이종윤 목사

<한국기독교학술원장ㆍ몽골울란바타르대 명예총장ㆍ서울교회 원로>

한국장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