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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말씀의 샘 > 강해/제자의 도 > 요한 칼빈의 기독교강요 강해
2010-11-18
구원을 누림 : 성령, 믿음과 확신, 회개 2
막 9:23-29, 롬 7:15-25
 

제16강 구원을 누림 : 성령, 믿음과 확신, 회개(Ⅱ)
(막9:23-29, 롬7:15-25)

②믿음의 본질로서의 확신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객관적 확실성 이상의 것 즉 인격적이고 주관적인 확신을 포함한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칼빈은 그의 주석 전체를 통해서 확신이 믿음에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을 강조한다.(행2:29, 고전2:12 주해) 믿는다면서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확신이 결여된 사람은 참된 신자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3.2.16)
칼빈은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의심하는 사람은 버림 받은 사람(reprobates)이라고까지 말한다.(고후13:5 주해)

③신앙과 확신 대 불신앙
불신앙은 좀처럼 사그러들지 않고 확신은 종종 의심과 싸우게 된다. 심한 유혹, 씨름, 투쟁은 정상적인 것이다. 사단과 육신은 믿음을 공격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두려움으로 싸여 있다.(3.2.7). 모든 사람 속에서 불신앙은 언제나 신앙과 뒤섞여있다. 우리 마음속에는 불신앙이 너무도 깊이 뿌리 박혀 있고 우리는 늘 그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이 있다. 각자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3.2.4,15)
믿음에는 확신이 있어야 하나 이생에서는 완전한 확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을 떠나기까지 신자는 불신앙으로부터 완전히 치료받지 못할 것이다. 의심하려는 유혹에 끊임없이 시달린다.(3.2.18-20) 그리스도인은 방해가 없는 확신을 얻고자 분투한다. 그러나 완벽하게 도달하지는 못한다.
칼빈은 신앙의 단계를 인정하면서 믿음의 시작, 연약한 믿음을 말하면서 더 이상 진보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완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요2:11 주해) 성령이 믿음을 성장시키신다. 자신이 바른 믿음 상태에 있음을 인지하는 사람만이 참신자라 한다. 믿음의 강력한 확신을 말하면서 확신이 거의 없는 상태의 믿음도 허용한다. 확신은 의심으로부터 자유해진 상태이면서도 아직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그것은 망설일 수 없으면서 망설일 수 있다. 마음이 안전한 상태에 있으면서도 불안에 둘러싸여 있다. 신실한 신자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흔들리며 떤다.

④이율배반의 해결

ⅰ) 칼빈은 믿음의 정의와 신자의 실제 경험 속에서의 믿음을 구분해야 한다고 한다.
바울이 보여준 것은 우리가 평온한 심정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존전에 서 있을 수 있을 정도가 못된다면 그건 바른 믿음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담대함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심과 구원하심에 대한 분명한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믿음이 확신을 의미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서 믿음이 성장할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3.2.15; 3.3.8)
칼빈은 믿음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하나의 목표 수준을 제공해 준 것이다. 경험적인 관점에서 믿음을 정의하면 혼돈이 생긴다. 확신은 믿음의 바라봄에서 나오는 것이 칼빈의 견해다. 이 바라봄이 아직은 희미하고 초보적일지 모르지만 지극히 작은 믿음의 행위가 있었기에 가능케 된 것이다. 지극히 작은 믿음이라도 그 한방울이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면 그 즉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평화롭고 고요하며 은혜로운 얼굴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물론 멀리서 그 분을 바라본다. 그러나 적어도 속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는 정도만큼은 충분히 명료하게 보는 것이다.(3.2.19)
막9:24에서 내가 믿나이다 라는 말과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는 모순으로 보이지만 우리 중 누구도 자신이 이 둘 모두를 경험하지 않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완전하지 못하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부분적으로는 불신자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오래 참아 주시는 가운데 우리 안에 있는 이 작은 믿음을 인해 우리를 신자로 여겨 주시는 것이다. 믿음에 대해 아는 것(당위성)과 믿음을 경험 하는 것(믿음의 현실성)이 말씀 안에서는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한다. 믿음에 대한 지식은 말씀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으로서 아직은 완전히 우리에게 드러나지는 않았다. 말씀을 이행할 때 솟아나오는 경험적 지식, 이 두 종류의 지식이 필요한 것을 강조하면서 칼빈은 두 지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임을 말한다.

ⅱ) 육과 영
믿음의 당위성과 현실성의 긴장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두 번째 원리는 육신과 영의 원리다. 칼빈은 당위성과 현실성의 이원론을 영과 육의 전투라는 배경 속에 놓는다. 그리스도인들이 영과 육의 긴장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이 일이 성령에 의해서 촉발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한 것으로 보아 두려움과 믿음이 한 마음에 공존하는 것을 본다. 육신의 불완전함 옆에 나란히 영안에서의 확실한 위로를 놓는데 칼빈이 바로 이런 상태가 신자가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현상이라 한다.
육에 대한 영의 최종 승리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취 가능한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은 이생에서는 끊임없는 투쟁 가운데 있는 자신을 보게 된다. 육신이 불신앙을 향한 자연적 성향을 작동시키고 있는 그 순간에도 그리스도인의 영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식하면서 기쁨으로 가득 찬다.(3.2.18.20) 육신의 흔적이 남아 있는 한 그는 매일같이 양심의 갈등에 둘러 싸여 있게 되어 있다.(요13:9 주해) 신자의 현 상태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는 너무나 못 미친다. 우리의 신체는 먼지와 그림자에 불과하고 사망은 언제나 우리 눈앞에 있다. 우리는 천 가지나 되는 비참에 노출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는 항상 우리 내부에서 지옥을 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요1서3:2 주해)
중생치 못한 이들에게는 이 같은 갈등은 없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죄를 미워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신자는 사실 더 진실하게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지면 드려질수록 그는 더 심하게 그 분의 진노를 느끼고 동요한다.(시6:6 주해)
두려워하고 떨며 경외하는 영이 믿음을 세우고 교만을 막는다. 두려움은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는 바른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함으로써 확신이 생겨날 수 있다.(3.20.11) 이 육과 영의 긴장이 신자로 하여금 육의 욕구에 빠지거나 절망 속에 포기하지 않도록 지켜준다.(3.2.17) 신자의 영은 결단코 완전히 절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망의 고비마다에서 믿음이 자라게 되어 있다. 영적 싸움은 믿음을 강화시킨다.(3.2.22-23)
성령의 도우심으로 모든 투쟁 위로 천상적 믿음이 일어나고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실 것임을 신뢰하는 것이다.
신자가 육신적 의심으로 고통을 받는 순간에도 그의 영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신뢰할 수 있는데 특히 그가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부르고 성례에 참예하는 가운데 그분을 더욱 의지할 때 이 일이 일어난다. 자신을 위험에 빠뜨리려는 모든 난관들을 이기고 믿음은 결국 승리하고 만다. 마치 종려나무처럼 믿음은 내려 누르는 모든 짐들과 싸워 이겨 위로 뻗쳐오르고야 마는 것이다.(3.2.17)
신자의 영으로부터 소망, 기쁨, 확신이 일어나는 반면 육신으로부터는 두려움, 의심, 환멸이 일어난다. 육과 영이 동시에 작용하지만 불완전과 의심이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다. 육신의 일이 종종 믿음을 따라 오기도 하지만 믿음과 섞여 버리는 것은 아니다. 신자가 영적 전투에서 지는 일도 생기지만 육신과의 전쟁 자체에서 궁극적으로 패배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기도와 성례라는 수단이 믿음의 영으로 하여금 궁극적 승리를 얻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ⅲ) 믿음의 배아와 믿음의 의식
가장 작은 믿음의 배아(germ)도 그 본질 속에는 확신을 포함하고 있으며 신자가 자신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 확신을 항상 붙잡고 있을 수 없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은 의심, 당혹감으로 인해 흔들릴 수도 있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심겨진 믿음의 씨앗은 결코 죽지 않는다. 성령의 씨앗이기 때문에 믿음은 확신을 유지할 수 있다.(3.2.21)
확신을 가지는 것은 누구에게나 정상적이다. 다만 신자가 그것을 의식하는 정도와 이 의식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정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다. 신자로 하여금 성령을 의지하는 가운데 은혜의 수단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더 강한 믿음을 추구하도록 격려하고 촉구해야 한다.

ⅳ) 삼위일체적 구조
성부의 택하심은 사단의 일들을, 성자께서 성취하신 의는 신자의 죄악성을, 그리고 확신을 주시는 성령의 증거는 신자의 연약함을 반드시 이겨내고 승리하고야 말 것이다. 신앙도 불신앙을 확실히 정복해 내고야 말 것이다.
믿음의 은혜는 성부로부터 성자 안에서 성령을 통해서 온다. 그리고 이 은혜를 힘입어 이번에는 신자가 성령에 의해 성자와의 교통 속으로 들어가고 성부와 화목케 된다. 성부께서 선택하시고 택하신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보존해 주심이라는 것은 가볍게 여길 신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정이라는 주제는 바르게 파악하기만 하면 믿음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확실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한다.(3.24.9) 특히 부르심(calling)이라는 맥락 속에서 예정을 생각할 때 분명해 진다. 그러므로 이 선택은 우리의 확신을 세워주는 또 다른 수단이다. 그리스도께서 받아주신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 위탁하고 맡기셔서 영생에 이르도록 지키게 하셨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3.24.6)
하나님의 작정을 통한 선택(decretal election)은 우리의 보존과 확신을 위한 확실한 기초가 된다. 그리고 확신의 기초로서의 선택에 대한 이해는 기독론적 맥락 속에서만 가능하다. 칼빈은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선택의 거울로 쳐드는데 이 거울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선택을 바라봐야 하고 또한 자기 기만없이 그것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이다.(3.24.5) 구원의 어떤 조건도 충족시킬 수 없는 자신의 소망없는 무능력에서 눈을 돌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과분한 사랑과 자비의 보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 있는 소망으로 시선이 집중되게 한다.(3.24.6)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선택의 확신으로서의 구원의 확신은 실제적이고 효과적인 것이 된다.(3.1.1) 우리를 구속하시고 부활시키고자 하신 하나님의 결정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것이 되심으로서 성취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는 분으로 여겨서는 안된다.(3.2.24) 그리스도는 늘 우리를 위하는 분이시다. 그 분을 진정 묵상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지금 주고 계시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스스로 작게 만드셨다고 칼빈은 말한다. 그리스도를 우리가 알고 그 분에게 피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벧전1:20 주해)
참된 믿음은 그리스도 안에 푹 담겨져 있는 것이기에 그리스도를 넘어선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하며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엡4:13 주해)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분리시켜서도 또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분리시켜서도 안된다.(3.2.24)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자신의 선택을 보고 복음 안에서 그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듣는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처럼 보이던 자들이 그 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날마다 일어나고 있고 그런 자들은 한번도 진실한 신뢰로 그리스도를 붙잡은 적이 없다. 이러한 신뢰야말로 우리에게 구원의 확실성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3.24.7)
칼빈 스스로가 자비의 심판(a judgement of charity)이라 한 목회와 설교를 실천하는 가운데 구원받은 자라는 말을 썼다. 그러나 선포된 말씀을 구원의 믿음으로 받는 자는 극히 적은 수(종종 20%라고도 함)에 불과하다고 했다. 열명 중 한명도 안되는 사람들이 그 말씀의 맛을 보고 끝까지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는 정도라고 하면서 말씀으로부터 유익을 얻는 사람은 백에 하나도 안된다고까지 했다.(시119; 101등 그의 주석에서 30회이상 언급 3.21-24)
믿음과 닮아 보이는 것들, 미숙한 믿음, 맹목적 믿음, 일시적 믿음, 환상, 믿음의 거짓된 내보임, 지나가는 믿음, 위선적 믿음은 구원의 믿음이 아니라 한다.(3.2.3, 5.10-11) 자기점검의 과정 속에서 칼빈이 강조하는 대상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 한 분만 신뢰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칼빈은 선택의 목적을 구원에 있다고 한다. 선택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택함 받은 것이지 자신 안에 있는 어떤 것 때문이 아니라 한다. 선택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을 결코 자신 안에서 찾아서는 안된다. 그들의 확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와의 교통이 필수적이다. 그리스도와 그 분이 주시는 유익들을 얻는 택함 받은 자의 확신을 성령이 주신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속하셨음과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하였음에 대한 확신을 주신다.
구원의 적용에서 성령께서 인격적 위로, 신자에게 입양된 사실을 확신시켜 주신다. 선택자는 썩지 않는 씨로 거듭났다.(3.2.41) 성령이 없이는 아무도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다.(3.2.35)

이종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