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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2
"랍비여 나는 아니지요?"
2017 홍해작전 설교요약

첫째 날
성령강림의 약속
(행 1:1-11)


사도행전은 예수께서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시므로 그들이 어떻게 일했는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수많은 위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이 위기를 타파해 나갔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성령이 오실 것을 준비하면서 우정의 발전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수신자가 ‘데오빌로 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는 똑같은 사람을 ‘데오빌로여’라고 부릅니다. 발신자와 수신자가 이제는 더 이상 격식이 필요 없는 친숙한 관계가 된 것을 보여줍니다. 우정은 성도의 교통으로 이어져 하나님의 교회를 세워나가는 원동력이 됩니다. 초대교회에는 우정 뿐 아니라 메시지를 발전시켰습니다. 갓난아기에게는 젖을 먹여야 하고, 이유기에는 이유식을 먹여야 합니다. 그러나 성장한 후에는 각종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해야 하듯이 신자도 신앙 성장에 따른 메시지를 받아야 합니다.
한국교회도 100년이 넘은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무속신앙과 기복신앙에 머무르겠습니까? 피동적인 것에서 능동적인 것으로, 들음에서 행함으로, 처세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승화 되어야 합니다. 기적 중심에서 십자가 중심으로, 후회하는 것에서 회개하는 자리로,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발전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부활 후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스라엘의 회복이 언제입니까?”라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문제를 질문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드냐? 너희 눈에는 내가 혁명가로 보였드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몹시 섭섭하셨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때이니이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동문서답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문제 해결에 근본적인 방법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능력 없이 문제를 풀려고 하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밭을 가는 사람은 쟁기를 다루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일을 수행하려고 한다면 수행할만한 역량이 있어야 합니다. 욕심과 열심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초대교회에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서 우리를 형성하고, 모였을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또 성령이 임하셨을 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고백이 나왔고, 고백한 그들이 나가서 전도했고, 전도한 그들이 다시 모였으며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교회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공동체 신앙을 잘 형성하여 내가 살고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민족 국가가 소생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둘째 날
박해 중에 당할 수 없는 사람
(행 6:8-15)


초대교회에는 예수 믿는 사람에 대한 박해가 대단히 심했습니다. 신앙으로 이 죽음을 이긴 스데반 집사를 두고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대제사장도, 서기관도 권력가도 아닌 한 평범한 신앙인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핍박은 위기가 아니라 기회입니다. 이 세상에는 권력의 박해, 돈의 박해, 향락의 박해가 있습니다. 이 박해를 이기는 방법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제 길로 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세상의 박해를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세상의 박해로 인해 교회는 성결하게 되었습니다. 핍박이 올 때 교회는 오히려 새로운 비전을 바라보게 되었고, 생동감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핍박 가운데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고, 사실 앞에 겸손했고, 진리 앞에 정직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배은망덕하지 않았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생사를 초월한, 이해를 초월한, 국경을 초월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스데반은 매사에 정당하여 공익 중심이고 봉사 위주의 삶을 살았고 무엇보다 신적 권위를 가지고 일을 했습니다. 동시에 스데반 집사에게는 그 누구도 말을 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논리나 음성이나 화술 때문이 아니라 스데반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선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영혼 구원의 열정을 가지고 말했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힘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은 중상과 모략을 당하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빛났습니다. 천사는 진실의 상징입니다. 스데반은 거짓이 없는 진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는 경건의 상징입니다. 스데반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천사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모든 것을 다 예수님께 맡기므로 스데반은 평화로웠습니다.
우리가 위대한 신앙인이 되려면 역사관을 바로 가져야 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거듭 은혜를 베푸셨던 과거를 은총의 역사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은총의 역사를 패역의 역사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뉘우치고 회개하면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습니다. 순종과 보답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 스데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재촉했습니다.
스데반은 최고의 죽음을 죽었고 하나님께 열납 된 죽음을 죽었습니다. 세상이 당할 수 없는 스데반 집사와 같이 우리 서울교회 모든 성도들도 순교자적 신앙을 가지므로 하나님 앞에 순종과 보답의 역사를 쓰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셋째 날
강조할 것보다 주변적인 것을 강조한 이들
(행 4:5-11)


예수님과 제자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회개하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었지만 사람들은 복음보다는 표적과 기사를 찾았습니다. 오늘날도 대부분의 크리스천들은 예수 복음보다는 정치적 자유, 세상적 부귀, 안일한 삶에 초점을 맞추고 그런 것들을 교회가 주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핵심 신학은 In Christ,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바울은 모든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행했습니다. 병 고침을 받은 앉은뱅이가 아니라 우리는 앉은뱅이를 고치신 예수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할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가견적인 것이 불가견적인 것으로 바뀔 때 문제가 생깁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사시면서 그 분이 말씀하시는 것과 기적을 행하시는 것과 가르치시는 것과 열매를 맺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승천하시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불가견적인 존재가 되었고,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습니다. 심지어는 성령께서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성령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령 없는 신자는 죽은 신자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믿지 않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과 대화한 후 마음이 뜨거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역사입니다. 교리로는 고혈압증 환자요 행위로는 빈혈증 신자는 성령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령 충만한 성도는 말씀 충만한 사람이므로 언제나 말씀 증거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됩니다. 또 성령 충만한 사람은 행동의 변화가 있고 말씀의 열매가 있습니다. 나눔의 삶을 살게 되고 희생의 삶을 살게 되고 증거의 삶을 살게 되고 무엇보다 언어가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열흘 동안 120문도들이 모여 기도를 했습니다. 구약에서는 성령께서 개별적으로 임하여 역사하시고 감화하셨지만 신약에 와서는 제 3위 신으로 이 세상에 강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초림하신 것처럼 성령께서 강림하신 것입니다. 예수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함이었다면 성령이 오신 것은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함입니다. 성령은 멀리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 계시고 항상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울고 헤맬 것이 아니라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교회가 강조해야 할 것은 세계복음화, 교회의 천국화, 문화의 기독교화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지도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선권을 바로 선정하여 예수님께 헌신하고 교회와 예수님께서 남기신 사역에 헌신하고 총력을 기울이는 서울교회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넷째 날
성장 중에 생기는 위기
(행 21:17-26)


오랜 만에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선포한 진리가 왜곡되고, 동지가 적이 되고, 무엇보다 신앙인이 불신앙인이 되어 자기의 원수가 된 것을 보고 무척이나 안타까웠습니다. 누구보다 바울을 지지해야 하고 예수님이 하신 일을 직접 보았던 그들이 예수님을 막고 바울을 적대시하였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 안에 비성경적인 요소들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여러 개의 계파가 생겨났고, 음란이 판쳤고, 우상숭배의 죄까지 범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은사 문제로 교인들 간에 늘 다툼이 있었습니다. 교회가 성장하다 보니 이런 위기들이 생겨진 것입니다. 이런 현상들을 Growing Pain, 성장 중에 생기는 아픔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의지하고 사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든 겸손과 눈물로 하나님을 섬겼다고 했습니다(행 20장). 바울에게는 야고보와 같은 동지도 있었고 훌륭한 장로들을 동역자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성전을 모독했다고 비난했고, 반민족주의자라고 했으며 심지어는 율법을 폐기한 자라고까지 공격했지만 바울은 끝까지 인내로 주를 섬겼습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전했고 행하였습니다. 바울은 무엇보다 역사가 일어나는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교회에서 역사하십니다. 120문도가 간절히 기도할 때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겸손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을 방문했을 때 로마 군인이었던 고넬료는 엎드려서 베드로를 맞이했습니다. 갈급한 심령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화합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드로의 전하려는 열심과 고넬료의 배우려는 열심이 있으므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초대교회에 조직에 위기가 생겼습니다. 질서를 위해서는 교회에도 반드시 조직이 필요합니다. 조직에 몸담게 된 사람들은 각각 이름값, 나잇값, 자릿값을 해야 합니다. 조직을 통해서 교회가 왕성하게 성장해야 되는데 초대교회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지 못한 사람을 세우므로 인해 조직의 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초대교회에 구제 문제로 인해 헬라파 유대인과 히브리파 유대인 간에 마찰이 생기자 사람들은 이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한 후 일곱 집사를 세웠습니다. 결과는 뜻밖이었지만 사람들은 그 결과에 승복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초대교회가 말씀에 복종하고 은혜가 충만했을 때 신자의 수가 증가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박해가 있거나 비판의 소리가 들려지면 대부분의 사람은 타협을 하거나 굴종을 합니다. 사회적으로 어려운 일이 많이 생겨질 때마다 사탄에 의해서 끌려가는 교회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서울교회 성도들은 핍박이 있든 칭찬이 있든, 동에 가든 서에 가든 항상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동일성을 가지고 변함없는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다섯째 날
거짓(위선)의 위기
(행 1:6-11, 5:1-11, 10:8-23)


구브로에서 온 요셉이 자기 밭을 팔아 하나님 앞에 헌금을 드렸을 때 사도들은 그를 몹시 칭찬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칭찬받고 싶은 마음에 자기들도 밭을 팔아 일부를 감추어 두고 사도들 앞에 가져왔다가 하나님을 속인 죄로 그만 죽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가 무거운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을 속였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부부가 악을 공모했다는 것입니다. 부부는 상대방의 약점과 허점을 서로 채워주므로 온전하게 행함이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제도입니다. 다윗은 아내 미갈의 불신앙을 책망했고, 아비가일은 나발의 미련한 행실을 고쳐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합과 이세벨은 함께 악을 도모했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성도가 진리로 거룩해질 때 거짓과 위선이 사라지게 됩니다.
사도들이 기사도 행하고 이적도 행하게 되자 그들에게 편견과 아집이 생겼습니다. 편견의 위기가 이때부터 생긴 것입니다. 욥바에서 기도하던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 각종 짐승을 잡아먹으라는 하나님의 명령 앞에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자기의 편견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이 세상에 절대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절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금력과 자기 자신을 상대화 시킬 때 모든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최종 권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베드로가 환상을 보고도 깨닫지 못한 것을 성령께서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런 후에 베드로는 마음과 시야와 행동반경이 넓어졌습니다.
초대교회에는 전략상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목표를 향해가는 방법이 매우 중요합니다. 어떤 방법으로 일을 하느냐에 따라서 결과가 확연히 달라지게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삶의 전략 은 양적 원리와 질적 원리입니다. 양적 원리는 씨 뿌리는 비유와 같은 것이고, 질적 원리를 위해서는 바른 신학이 기초해야 합니다. 신앙은 반드시 바른 신학 위에 기초해야만 질적으로 우수한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이라고 해서 머리로만 가지고 있으면 안될 것입니다. 신앙은 반드시 가슴으로, 행함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다면 더 이상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셨다면 우리의 기도는 권능을 가지게 될 것이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들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희생의 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편안하다면 누군가가 나를 위해 희생했기 때문입니다. 초가 녹지 않고는 촛불이 밝혀지지 않듯, 십자가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도 믿음으로 행하고 희생하므로 빛의 사명을 감당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여섯째 날
지도자의 위기
(행 8:1-2)


우리의 최고 지도자는 예수님이시고, 우리 모두는 중간 지도자입니다. 초대교회에 박해가 일어나자 사도 외에는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자기 몸을 불사르며 책임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지도자는 자기 희생정신이 강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The leadership is servantship, 참된 지도자는 자기를 희생하여 자기 모습은 없고 오직 종의 모습만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지도자는 자신을 교회와 일치시킵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자신을 교회와 일치시켰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돌에 맞아 죽는 시간에도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과 일치시킨 것입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을 만나신 예수님은 “사울아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십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했지 예수님을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교회와 일치시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자신을 따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대 웅변가였습니다. 이들의 말은 설득력이 있어서 백성들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그들의 말에는 확신이 있었고 자신이 넘쳐났습니다. 체험은 경험과 달리 주체와 객체가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를 말합니다. Union with Christ, 예수님과 연합되었을 때 우리는 예수님을 체험했다고 말합니다. 사도들은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은 사람들이어서 언제든지 담대하고 용기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 무장되었던 사도들의 말은 무게가 있었고, 가치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말만 잘한 것이 아니라 연합정신이 투철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을 결정할 때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전이란 단순한 꿈과는 다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비전으로 받고 끝까지 믿으므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바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지도자는 자기 꿈을 이루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지도자는 The Seer, 앞을 내다보는 사람입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지도자들은 때로 세상 사람들의 이해를 받지 못하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은 끝까지 인내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인내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인격을 믿고, 십자가에 소망의 줄을 든든히 매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승전하는 서울교회 온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합니다.


-정리: 허숙 권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