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광복의 기쁨은 잠시 교회 분쟁과 교단 분열로 고통······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세상 가운데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1945년 8월 15일, 마침내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 지배에서 해방되었다. 1945년의 첫 광복절은 자유와 해방의 빛을 다시 회복한 기쁨의 날이었다.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 방송으로 알려지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기쁨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자유를 알리는 종소리는 교회에서도 널리 울려 퍼졌다. 그러나 뜻밖에 주어진 자유와 해방은 이 나라를 혼란에 빠뜨렸고 여기저기서 폭력성을 띤 불미스런 일들이 불거졌다.
8.15광복의 그 날에 경상북도 풍기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흰옷 입은 군중들 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저마다 광복의 기쁨으로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그리고 군중들은 일본의 신사(神社)가 있는 관공서로 갔다. 그들의 손에는 도끼를 비롯하여 각종 연장이 들려있었다. 그들은 경찰 지서, 풍기초등학교, 풍기 면사무소에 있는 신사를 도끼로 찍어내고 삽과 괭이로 부수고 발로 짓밟았다. 8.15광복 직후에 한국 장로교회는 일제 식민지배 시대의 잔재를 청산하려다가 전혀 뜻하지 않은 논쟁과 분열에 휘말렸다.
그 해 8월 17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저항하여 평양의 감옥에 갇혀 있던 교역자 등 20여 명이 출옥했다. 그러나 50여 명은 이미 옥사한 후였다. 출소한 이들은 꿈속에서도 그리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양 산 정현 교회로 모였다. 거기서 약 두 달 동안 지내며 신사참배 굴복과 더불어 무너진 교회의 재건에 관하여 논의했다. 그리고 9월 20일 교회 재건을 위한 기본 원칙을 발표했다. 부산에서도 ‘출옥 성도’들을 중심으로 ‘경남재건노회’(1945. 9. 8)가 모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교회가 새롭게 출발을 하려면 지나온 과거 곧 신사참배 강요에 굴복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보았으므로 이 과제를 논의했다. 1946년 6월에는 남한의 교회만 모인 ‘남부총회’에서 신사참배 문제가 거론되었다. 총회는 1938년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했고 아울러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날에 해당되는 주일 하루 를 ‘통회자복일’로 정해 이를 시행했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 정화를 요청하는 교인들이 보기엔 그저 눈가림에 불과했다. 이들은 “최소 한두 달 동안 회개하는 기간을 갖자”고 요구했고, 총회는 그 기간을 단 하루 동안만으로 정했다. 더욱이 총회는 신사참배에 굴복한 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징계 조치에 대하여 는 언급조차 없었다. 교단의 논쟁이 파도처럼 크게 일어났고, 1950년대에 장로교회가 세 차 례나 분열되었다. 그 결과 4개의 장로교회 교단이 생겼다.
8.15 광복의 기쁨은 잠 시뿐이었고 교회는 교회 분쟁과 교단 분열로 말미암은 고통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렇게 분열된 장로교회는 반세기 이상 그 상태로 유지되거나 더욱 여럿으로 분열되었다. 분열과 갈등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나, 세상이나, 언제 어디에서나 존재하 고 영원히 풀리지 않는 문제로 남아있다. 아마도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올해는 광복 77주년이 되는 해이고 새 정부가 들어선 역사적인 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여전히 진영과 이념, 동서의 갈등으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으로 촉발된 세계적인 인플레이션과 좀처럼 종식되지 않는 코로나 팬데믹은 민생을 더욱 힘들게 하고 있으니 오, 주님! 언제까지입니까?
77년 전 이 나라, 이 민족에 해방의 기쁨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제는 제발 교회만이라도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여 세상 가운데서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한반도 와 동북아시아의 평화에 기여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