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사, 국왕을 호위하다
1895년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주도 아래 명성황후가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청일전쟁을 승리하고 러일전쟁을 준비하던 일본이 조선의 대 러시아 관계 핵심이 명성황후라고 판단하고 제거한 것이었다. 왕실의 상징이자 조선의 안방인 경복궁에서 황후가 시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조선 사회는 큰 충격에 빠졌다. 고종의 충격은 더욱 컸다. 복수를 해 주는 사람에게 자신의 상투를 잘라 짚신을 삼아 주겠다고 말할 정도로 상심과 분노가 컸을 뿐 아니라 자신도 언제든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불안에 휩싸였다.
일본과 친일파 관료에게 포위당해 사실상 경복궁에 감금된 고종은 극도의 불안을 느끼며 식사도 잠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나마 서양인이 자신의 주변에 있어 준다면 일본이 함부로 행동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 고종은 미국공사관을 통해 선교사들에게 불침번을 서달라고 부탁했다. 이 요청에 따라 언더우드, 에비슨, 아펜젤러, 헐버트, 존스가 미국 군사고문인 다이(William M. Dye)와 함께 7주 동안 권총으로 무장한 채 매일 밤 왕의 침소를 지켰다.
독살을 염려하여 음식도 먹지 못하는 고종의 식사를 준비한 것은 언더우드의 부인인 호턴과 러시아 공사의 부인이었다. 이들이 만든 음식은 미국 자물쇠로 잠긴 큰 양철통에 담겨 고종에게 전달되었다. 양철통은 조선의 관료들이 옮겼지만 자물쇠를 열 수 있는 열쇠는 반드시 언더우드가 고종에게 직접 전달했다. 고종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고종은 의사인 에비슨이 개봉된 음식에 독이 들어있지 않다고 확인한 후에야 음식을 먹었다.
고종은 일본과 친일파 관료가 장악하고 있는 경복궁을 벗어나 미국과 러시아의 공사관이 있는 정동으로 탈출하기를 원했다. 감시를 피할 기회를 엿보던 고종은 언더우드의 손을 잡는 척하며 자신의 뜻을 적은 밀지(密旨)를 전달했다. 언더우드가 받은 메시지는 정동의 서양인에게 전달되었다. 서양인들은 인간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고종이 정동으로 피신하는 것을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들은 친미?친러 성향의 조선인 관료들과 논의하여 1895년 11월 28일을 기해 국왕을 탈출시켜 미국 공사관에 모신다는 계획을 세웠다.
거사 당일, 조선의 관료와 서양인 사이의 연락책임을 맡은 윤치호는 미국공사관에 국왕의 보호를 위해 서양인이 입궐해 있을 것을 요청했다. 다시 선교사들이 나섰다.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가 고종을 호위하기 위해 경복궁에 들어갔다. 고종은 선교사들을 반기며 밤샘 경호를 위해 침소 인근의 장교 숙소에 있어줄 것을 부탁했다. 자정 쯤 조선 관료들이 조직한 구조대가 경복궁의 춘생문에 도착해 총격전을 벌였다. 총소리를 들은 선교사들은 권총을 들고 고종에게 달려가 옆을 지키며 구조대를 기다렸다.
하지만 구조대는 오지 않았다. 구조대 중 호위대장 이진호가 변심하여 밀고하는 바람에 10여 명이 현장에서 체포되고 나머지는 도주했기 때문이다. 거사가 실패하자 곧 친일내각의 총리 김홍집 등이 찾아와 고종을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다는 명분으로 끌고 가려 했다. 김홍집이 고종의 손을 잡아당기자 고종은 에비슨의 손을 꼭 잡고 놓지 않았고 에비슨은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고종이 움직이지 않자 군부대신 어윤중이 왕세자를 끌고 가려 했다. 왕세자는 언더우드의 손을 잡고 버텼다. 김홍집 일행은 결국 소득 없이 돌아갔다. 하지만 고종을 탈출시킨다는 원래의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을 이른바 ‘춘생문 사건’이라고 부른다.
춘생문 사건은 조선 왕실과 선교사들이 신뢰와 우정의 관계를 쌓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선교사들은 고종을 위한 봉사를 매우 기쁘게 생각했고 훗날 헐버트는 고종의 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몰락하는 나라의 왕실이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선교를 개시한 지 10년 밖에 되지 않은 이방 종교의 선교사였다는 사실은 매우 서글픈 일이다. 신하에게 맞설 힘이 없어 선교사의 손을 잡고 버텨야 했던 고종의 비참함을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