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4년 5월 3일 금요일 3교구와 5교구가 함께 인천 강화군 일대의 기독교 유적을 답사하고 왔습니다. 130여 년전 척박한 조선 땅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목숨을 걸고 전한 복음 덕분에 대한민국이 오늘날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서구 열강의 침략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의 복음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치부될 수 있겠지만, 이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일들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역사이며, 그 사명을 감당한 선교사들의 발자취가 늘 궁금했습니다.
강화도 지역의 기독교는 감리교와 성공회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따라서 강화도의 선교 유적은 주로 성공회 성당 혹은 감리교회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방문한 '강화읍 성공회 성당'은 겉에서 보았을때 1900년에 지어진 한옥식 건물로 보여지지만, 막상 내부에 들어가 보면 천고가 높은 서양의 바실리카 양식에 따라 지어져 있었습니다. 선교지의 건축 양식을 존중하되, 성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동양과 서양의 조화가 매우 이채로왔습니다. 유배지 강화에 이처럼 큰 성당이 세워진 이유는 초기 선교사들이 이곳을 영국의 이오나(Iona) 섬처럼 신앙의 성지로 삼으려는 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또한 강화도 감리교회의 모교회인 '교산교회'도 방문하였습니다. 1892년 가을, 제물포 구역 책임자로 있던 존스(G.H. Jones) 선교사가 강화 남문을 통하여 강화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려 하였으나 강화유수의 완강한 거절로 입성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다음해 양사면 시루미 마을 출신으로 제물포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이승환이 존스 목사를 만나면서 복음이 들어오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존스는 이승환의 모친에게 선상에서 세례를 주고 인천에서 활동하던 전도인 이명숙과 전도 부인 백헬렌을 시루미로 파송하여 이승환의 집에서 예배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실제 교산교회의 앞에는 선상에서 이승환의 모친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이 동상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조선인의 복장을 하고 배 위에서 첫 세례를 베풀던 존스 목사의 벅찬 감동이 느껴지는 듯 했습니다.
이외에도 평생을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개발 및 점자 성경 편찬에 힘쓰신 박두성 장로의 생가와 교동교회, 성공회 온수리교회를 방문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초지진을 방문하여, 조선말기 역사의 아픔을 느껴보았습니다. 당시 한양으로 향하는 적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초지진은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운양호사건(1875년)을 거치며 외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관군의 붉은 피가 물들었던 곳으로, 당시 격렬한 전투의 흔적은 성곽 입구의 소나무에 포탄 흔적으로 아직도 남아 있었습니다.
변변한 근대 무기도 없이 오직 조국을 지키겠다는 신념으로 끝까지 저항하다 모두 전사했지만, 그들의 투지와 눈빛을 잊을 수 없다는 어느 서양 장교의 말이 초지진 앞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열강의 침략과 함께 전해진 복음, 그 복음이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생각에,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뜻깊은 유적 답사를 기획하고 준비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강인녕 성도 (3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