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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들에서 만난 풍요
마 14:13-21


주님은 오늘도 삭막하고 냉정하고 희망없는 빈들 같은 우리 삶의 자리로 임재하십니다. 위로하시고 고치시고 먹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의 기적 중 4복음서 모두에 기록된 내용은 흔치 않지만 유일하게 광야의 빈들에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4복음서 모두 기록되었습니다. 빈들의 황량함과 무정함과 공허함이 주님의 은혜로 기쁨과 감격과 사랑이 넘치는 풍요의 빈들로 바뀌었습니다. 창세기는 창조 이전의 세계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 1:2)라고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 공허한 무의 세계가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시면서 생명이 약동하는 충만한 세계로 바뀌어갔습니다. 마치 세계는 어미닭이 알을 품어 부화시키는 것처럼 하나님의 품 안에서 새로운 지구 생명공동체로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고 했습니다. 본래의 세상, 본래의 인간, 하나님 없는 세상은 흑암과 공허와 무의미한 것으로 가득했지만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시면 모든 것에 생명이 넘치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 임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되 더 풍성하게 주시는 분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으로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십니다.(엡 1:23) 본문은 주님께서 임재하시고 일하시는 곳인 메마른 빈들의 빈곤이 풍요롭고 차고 넘치는 충만의 자리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1. 빈들에 오신 주님
 이때는 세례 요한이 순교한 직후였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400년 만에 나타난 선지자였고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의 정의로운 외침은 백성들에게 영혼의 청량제 같았습니다. 세례 요한은 힘없는 백성들의 희망이었고 어두운 세상의 등대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어이없게 헤롯의 칼에 순교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예수님도 큰 상처와 충격을 받으셨고 그를 선지자로 여기며 따르던 많은 백성들은 위로 받을 길이 없는 허탈한 마음을 안고 예수님 계신 곳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의 대부분은 병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날은 이미 저물었고 이들이 먹을 음식은 없었습니다.(13 - 15절) 이때 제자 들은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먹게 하자’고 제안하는 냉정한 모습을 보입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이웃과 만남을 기뻐하고 내일을 그리워할 그 무엇도 없는 상황, 그것이 빈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빈들에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이것이 희망의 시작이었고 변화 의 출발이었습니다. 빈들에 오셔서 현장을 살펴보신 주님은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막 6:34에서는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빈들같은 삭막한 세상에서 내게 유리하지 못한 사정들을 비판할 뿐 이 세상을 끌어안고 기도하고 눈물 흘리고 세상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빈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안타까워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허전하고 괴로운 마음으로 모여든 그들을 어찌 도울 수 있을지 고민하셨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실망한 사람들에게 해가 저물도록 말씀으로 위로하시고 이제는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자고 하십니다. 주님의 긍휼과 안타까움과 사랑 의 임재가 있는 이 현장은 비록 빈들이었으나 가장 풍요한 곳으로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오늘도 삭막하고 냉정하며 희망없는 빈들 같은 우리 삶의 자리로 임재하십니다. 위로하시고 고치시고 먹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2. 빈들에 베푸신 능력
 오병이어가 오천 명이 먹고 열두 바구니에 넘치도록 거두는 축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6장의 말씀에 따르면 이 표적 이후에 군중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해산하게 하고, 제자들은 배를 태워 건너편으로 보내시며 예수님 자신은 기도하기 위하여 산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유대인의 메시아 대망 사상 가운데 광야에서 모세가 만나로 백성들을 먹인 것처럼 백성들의 먹거리 문제를 해결하는 지도자 메시아일 것이라는 기대와 관련 있는 반응입니다. 군중들은 ‘당신이 하시는 일이 모세가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먹인 것처럼 우리에게 떡을 먹이셨는데 이것이 당신이 우리 메시아이신 증거 아닙니까?’(요 6:30 이하)라고 묻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기적을 통해 자신이 인생들에게 영생하는 생명의 떡으로 자기 몸을 주실 것임을 상징하는 표적으로 이 역사를 주셨음을 설명하셨습니다. 후에 주님은 다시 그를 찾은 사람들에게 ‘나는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자기 생명을 우리를 살리시는 생명의 양식되게 하시려는 자기희생을 의미했습니다. 이 일은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씀이기도 합 니다.
 빈들을 풍요의 현장이 되게 하는 것은 ‘마을 로 돌려보내자’는 논리나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필요하다’는 발 빠른 계산 능력이 아니라 자기희생을 통해 세상의 양식이 되시려는 십자가 정신입니다. 주님께서는 삭막하고 냉정한 세상을 녹이시려는 수고를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희생을 당연한 삶의 원리로 아셨고 실천하셨습니다. 이런 희생의 주님께서 계신 곳에는 흑암과 공허의 세상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현장이 되고, 빈들은 풍요한 축제 현장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기적을 사람들에 대한 긍휼, 현실에 대한 감사, 자기희생의 실천으로 이루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라고 했습니다.

 3. 빈들에 나타난 만족
 이 광야에는 현실 정치의 잔혹함에 치를 떠는 사람, 어이없이 형장에서 사라진 의인, 세례 요한이 아까워서 통곡하는 사람, 일용할 양식이 없어 견디기 어려운 사람, 병든 사람, 자기 책임을 면하기 위해 마을로 사람들을 흩어지게 하자는 사람, 탁월한 능력으로 필요한 재정 규모를 계산하는 사람, 한 소년의 도시락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께 드린 안드레 같은 사람 등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주님의 역사하심 앞에 모두가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많은 것이 갖추어진 삶을 살고 있지만 결코 만족함이 없습니 다. 때로는 다른 사람의 만족이 나의 결핍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광야에는 제자들도 군중도 어른도 아이도 모두가 만족합니다. 우리 예수님의 복음은 모든 민족들을 만족하게 하는 복음입니다. 특수한 민족, 특별한 계층과 신분의 사람에게만의 복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 복음입니다.
 광야에서 은혜가 나타난 결정적 순간은 주님께서 오병이어를 손에 들고 축사하실 때였습니다. 먹을 사람은 광야에 가득한데 주님 손에 들려진 것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것으로 축사하셨습니다. 축사라는 말 'Euxaristo'는 감사한다는 의미입니다. 기적은 감사하는 주님 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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