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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강 : 사도신경-성자 하나님 (5)

45문 :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첫째, 그리스도는 부활로써 죽음을 이기셨으며, 죽으심으로써 얻으신 의에 우리로 참여하게 하십니다. 둘째,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이제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났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영광스런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매주 사도신조를 통해서 입으로는 “몸의 부활”을 고백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죽은 자들이 몸으로 부활할 것에 대해서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몸의 부활을 믿기보다는 영혼불멸을 믿기 때문입니다. 영혼불멸과 몸의 부활의 상관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들의 일원론적 사고와 헬라인들의 이원론적 사고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는 악하고, 영혼은 선하다고 믿는 헬라적 이단인 영지주의자들은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물든 고린도교회의 일부 신자들도 죽은 자들의 부활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음을 강조하면서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12-58.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활신앙은 영혼불멸이 아니라 몸의 부활입니다. 단순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본질이 변화된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새로운 생명으로 살 것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얻었습니다

46문 : “하늘에 오르셨고”라는 말로 당신은 무엇을 고백합니까?


 답:그리스도는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땅에서 하늘로 오르셨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에 계시며, 장차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일이 있기 전에 이미 승천했던 두 사람들의 이야기가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창세기에 기록된 에녹의 이야기 창세기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이고 다른 하나는 열왕기하에 기록된 엘리야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하 2:21, 두 사람이 길을 가며 말하더니 불수레와 불말들이 두 사람을 갈라놓고 엘리야가 회오리 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가더라.
 두 사람의 이야기를 알고 있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이 낯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과 예수님의 승천은 같은 현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표현을 사용하여 차이를 설명하면, 에녹과 엘리야의 승천은 우리의 유익과 상관없지만 예수님의 승천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신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직접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요한복음 16:7 (개역개정).
 예수님의 승천이 우리에게 주시는 유익은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오심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오르신 또 다른 이유는 장차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러 다시 오실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심판의 대상인 살아 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했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루셨는데도 우리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떠올려 보면 이해에 도움이 됩니다. 비록 죄와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죽는 이유는 두 번의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의 표현으로는 다음과 같습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브리서 9:27 (개역개정).
 첫 번째 죽음은 육신의 죽음이고, 두 번째 죽음은 영혼의 죽음, 곧 심판입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자들과 죽은 자들’이 가리키는 첫 번째 의미는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시점에서 살아있는 자들 그리고 죽은 자들, 곧 인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간 사람들 모두를 포함하는 인류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심판 때에 무죄 판결을 받게 되는 영혼이 살아 있는 자들과 유죄 판결을 받게 될 영혼이 죽은 자들을 의미합니다.

47문 : 그렇다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그리스도의 약속은 어떻게 됩니까?


 답:그리스도는 참인간이고 참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인성으로는 더 이상 세상에 계시지 않으나, 그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성령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다음과 같이 약속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마태복음 28:20b (개역개정).
이 약속을 문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인성과 신성으로 구분합니다. 인성으로는 더 이상 제자들과 함께 계시지 않으나, 신성으로는 잠시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설명합니다. 이렇게 인성과 신성을 분리해서 설명을 하면, 고대 교회의 기독론 논쟁에서 중요하게 다루었던 인성과 신성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칼케돈 신조에서는 두 본성은 혼합되지 않고, 변화되지 않고, 분할되지 않고, 분리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48문에서 추가적인 설명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지 않고도 이 문제를 간단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서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생각되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 방법은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대신 몸과 마음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은 늘 함께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설명을 보면 서양인들의 정서와 한국인들의 정서가 다르다는 것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영어 속담에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시야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번역하기도 하는데, “시야에서 멀어지면 생각에서도 멀어진다”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준 사람은 그 사람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와 있기에 잠시도 떠나지 않겠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몸과 함께 마음도 주셨고, 우리를 그 분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계시기에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은 지켜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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