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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슬픔과 큰 기쁨


구원하는 능력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이 우리 구주 그리스도이시다’라는 타협 없는 이 말씀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한 후 예루살렘 교회에는 엄청난 고난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에서 감동 넘치는 설교를 하며 유대인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며 의인 예수를 죽인 살인자들이라고 질타했습니다. 분노한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는 죽으면서도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스데반을 장사한 후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1. 흩어진 사람들
 스데반 집사의 죽음 후 사도들은 남아서 교회를 지키고 성도들은 유대인들의 야만적인 박해의 칼을 피해 여러 땅으로 분산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성도들은 ‘흩어진 사람들’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을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약 1: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벧전 1:1)라고 했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의 분산된 범위는 생각보다 넓습니다. 본문 1절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진 것을 말했지만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 시아, 비두니아에 흩어진 자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지경을 넘어서서 지금의 터키 지방까지 분산된 지역이 확장되었습니다. 롬 16장 말씀에 따르면 이미 바울의 많은 지인들이 로마에 모여들어 로마교회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게 되는데 그들 역시 흩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4절) 라고 했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평가하면 그들은 예수 믿고 망한 사람들입니다. 박해에 직면했고 추격해 오는 유대인의 눈을 피하기 위해 숨가쁘고 공포에 찬 시간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사도들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스데반의 뒤를 이어 야고보 사도가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남은 자들을 중심으로 기도의 불을 끄지 않고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동시에 흩어진 사람들은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예수 믿은 이후 모든 것을 상실한 사람들이 되었지만 믿음을 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전도하고 교회 설립하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했습니다. 남은 사람들이나 흩어진 사람들이나 지난 슬픔에 잠겨 살거나 위축되거나 혼미하지 않고 깨어 근신하고 기도하면서 복음 전하는 일에 더욱 전력했습니다. 복음의 일꾼들은 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흩으신 장소를 내 선교지로 알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최선을 다했습니다.

 2.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다
 본문에는 집사 빌립의 전도행적을 특별히 기록하고 있습니다.(5절) 많은 사람들이 여러 지방으로 내려가 복음을 전했는데 사도행전에 빌립 집사의 사마리아 전도를 특정하여 기록한 이유는 빌립의 전도가 그만큼 획기적이고 파격적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 은 오랜 역사 동안 악연을 이어왔습니다. 솔로몬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의 강압통치 선언에 실망한 여러 지파들이 다윗 왕조를 거부하고 여로보암 을 왕으로 추대한 후 사마리아 지방을 중심으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건국했습니다. 이때부터 예루살렘과 사마리아는 긴 역사의 시간 동안 악연으로 이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들을 이단으로 여겼고 마치 이방인들처럼 간주했습니다. BC721년 북왕국이 앗수르에게 망 하고 앗수르의 이민정책에 따라 그들의 혼혈이 가속화 되면서 그들을 향 한 남왕국 유다 사람들의 경멸은 더 심해졌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예루살렘 재건을 위해 힘쓸 때 사마리아 사람들이 돕겠다고 했으나 유다 사람들이 냉정히 거절하면서 양측의 관계는 완전 이 회복 불능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긴 세월을 그렇게 지내면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보다 사마리아 사람을 더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이 넘어가서는 안 되는 금단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용감하고 담대한 집사 빌립은 이 경계를 넘어갑니다. 버려진 사람들이 살고 더러운 귀신들이 역사하고 우울하고 외면당하는 소외된 사람들의 도시 사마리아에 그는 담대하게 혈혈단신으로 도전했습니다. 사마리아에는 빌립이 아는 사람도 안내자도 동역자도 없었습니다. 사마리아로 들어간 빌립은 오직 한 가지만 말했습니다. 그는 다른 일들, 문화, 혈통, 오랜 역사 등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사마리아 사람 들이 겪고 있는 삶의 여러 문제들에 대하여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 전파하였습니다.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얻는다는 단순한 진리만 전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은 놀라웠습니다.(6절) 생면부지의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전했는데 사마리아인들은 한마음으로 그의 말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구원하는 능력은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이 우리 구주 그리스도이시다’라는 타협 없는 이 말씀이 구원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에 집중하고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대를 향한 우리 의 사명이며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3. 기쁨이 찾아온 도시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8절). 열등감과 분노와 무기력과 삶의 고 달픔으로 우울함과 절망감이 가득했던 사마리아에 큰 기쁨이 찾아왔습니 다. 이 도시에 기쁨이 찾아온 것은 예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조건으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것이 인간 삶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상황을 초월하여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전도서에는 솔로몬이 허무를 탄식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솔로몬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것은 모두 누려보았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허무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허무하지 않는 유일한 한 가지를 고백하면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고 했습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인생 결론이었습니다.
 이 우울한 도시 사마리아를 큰 기쁨이 넘치도록 만든 것은 오직 예수 이름이었습니다.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한 사람들 역시도 슬픔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을 장례하고 큰 슬픔 가운데 가택 수색을 당하고 끌려가고 옥에 넘겨졌습니다. 다행으로 피하여 화를 면한 사람들은 가족들과 이별하고 난민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사마리아로 가고 가이사랴로 가고 갈릴리로 가고 땅 끝으로 갔습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예수 복음을 외쳤고, 그러자 그곳에 희망이 생기고 기쁨이 생기고 세상이 새로워졌습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고후 4:12).
 우리가 죽음에 넘겨지는 것처럼 희생했더니 많은 사람이 생명의 구원을 얻는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뜻입니다. 누군가의 희생, 누군가의 헌신이 있어야 하나님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큰 슬픔과 아픔을 짊어진 성도들이 십자가 지고 복음 전하면 큰 기쁨의 도시를 만들게 됩니다. 우리 모두 슬픔과 아픔은 가슴에 품고 예수 복음을 들고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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