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안에는 모든 민족을 새롭게 하고, 갇힌 자를 자유케 하고, 민족의 역경을 극복하게 하시는 성령의 위로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온 천하에 증거되기를 원하시고 그 일을 교회에 맡기셨습니다. 때문에 교회는 성도들을 가르치고 훈련하여 세상 속으로 내보내는 일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이 일이 너무나 위험하여 주님은 ‘양들이 이리 가운데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지만 그럼에도 교회는 복음 전도를 멈출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초기에 오신 장로교 선교사님들은 미국의 북 장로교회, 남 장로교회, 호주 장로교회, 캐나다 장로교회 등에서 파송 받아 왔습니다. 그들은 우리나라 전역에 흩어져 복음의 사자들이 되었고 예수사랑의 실천자들이 되었습니다. 양화진, 전주, 광주, 부산, 대구 등에 있는 선교사들의 묘역을 보면 선교사들의 묘지와 함께 어린 자녀들의 묘지도 같이 있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출생일과 사망일이 같은 어린 생명들, 두 살, 세 살에 세상을 떠난 어린 영혼들의 무덤은 보는 이들을 가슴 아프게 합니다. 선교사들은 자기 일생만이 아니라 어린 자식들을 이 땅에 묻으면서까지 한국 선교를 위해 일생을 바쳤습니다. 젊은 선교사들이 요절하고 자녀들이 희생되었지만 그분들은 선교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선교사를 보낸 미국이나 호주 등의 교단본부가 선교사의 안전을 이유로 철수를 명령했다면 한국교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성장한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흩어져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훈련된 전도자 중의 한 사람이 본문의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는 원래 예루살렘 교회가 구제헌금의 사용을 두고 문제가 생겼을 때 이를 해결하고 구제와 교회봉사를 위해 선택된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본래 책임은 교회 내의 구제를 담당한 긍휼사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역에 머물지 않고, 복음 전도를 위해 가슴의 뜨거운 피를 쏟고 삶을 바쳤습니다.
1. 담대한 도전
스데반 집사는 회당에서 사람들과 논쟁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8-10절) 그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이른바 ’자유민들’이었습니다. ‘자유민’은 노예로 살다가 자유민의 신분을 획득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원래 노예계층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로마의 동방정복의 책임을 진 폼페이우스가 BC63년 예루살렘을 점령함으로 로마의 지배를 받는 이스라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연히 여기저기에서 강력한 반로마 저항이 일어났습니다. 로마는 이 저항에 앞장 선 유대인들을 사로잡아 지중해 인근의 여러 도시로 이주시켜 노예가 되게 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외세에 저항한 민족주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시간이 지나 자유민의 신분을 회복한 후 귀국하여 예루살렘에서 그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고 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보수적 민족주의자들이었고 교회운동에 대하여 극렬한 반대 입장을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스데반이 이런 사람들을 찾아가 복음을 전한 것은 담대한 도전이었고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긴 신앙의 영적 결단이었습니다. 물론 이 도전은 무모한 일처럼 보였고 결국 그는 유대인들에 의해 돌에 맞아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자유민들을 향한 복음전도는 기독교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역사는 이런 담대한 도전으로 변화를 만들고 발전과 진보가 이루어집니다. 도전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이 신앙 안에 있습니다. 할 수 없는 일에 도전하십시오. 우리 능력으로는 감당 못할 일을 계획하고 꿈꾸십시오. 반대와 저항과 위험과 환경을 너무 두려워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십시오. 일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2. 격렬한 반대
자유민 회당의 사람들은 스데반의 전도에 격하게 반응했습니다. 스데반은 해박한 성경지식을 동원하여 장대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율법 시대가 끝이 났고 성전 시대도 종결되었고 이제는 예수의 시대가 왔다고 외쳤습니다. 예수님을 반대하는 그들이 의인을 죽여 ‘살인한 자’가 되었다며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데반의 긴 설교를 듣고는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고 했습니다. 강력한 보수적 민족주의자들로서의 그들은 ‘유대인 중심의 세계 재편’이라는 이상사회 건설을 목표로 생각했고 이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이단시하고 정죄하며 배척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 새로운 죄 사함의 길을 제시하고 모든 이방인들도 함께 구원받는 만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의 메시지는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스데반은 십자가 구원의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각에는 십자가 복음이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무관심하고 민족 내부의 결속을 해치고 질서를 위반한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반대하고 숙청하고 말살하려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복음 안에는 모든 민족을 새롭게 하고, 갇힌 자를 자유케 하고, 민족의 역경을 극복하게 하시는 성령의 위로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모든 문제 앞에서 먼저 예수 복음을 믿고 구원받아야 합니다. 그때 모든 세상의 일에 새로운 역사가 진행되게 하시는 은혜가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3. 천사와 같은 사람
강경한 유대 민족주의자인 자유민들은 끝내 스데반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반 성전, 반 율법의 혐의로 고발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극형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천사와 같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8절)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기 때문(10절)’이라고 했습니다. 사탄은 의도적으로 우리를 자극시킵니다. 모욕하고 분노하게 만듭니다. 때로는 불안과 공포에 잠기게 하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을 이기고 자기를 다스리는 능력은 성령으로 충만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있어 하나님의 성령과 그 은혜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성도의 위엄과 품격을 지키고 하나님의 복음이 훼방을 당하지 않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신호로 예루살렘에 격렬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사도 외에는 모두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행 8:1) 그러나 오히려 흩어진 성도들이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여러 지방에서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불씨들이 되어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게 되는 1세기 기독교 역사를 만들어 나갔습니다.(행 9:31, 벧전 1:1)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로 가득할 때 생긴 거룩한 능력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자극하고 모함하고 거짓으로 모욕할 때, 세상의 힘으로 나를 위협하고 압박할 때, 그때에도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힘입고 평화와 축복과 사랑의 모습으로 진정한 신앙인처럼 대응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게 됩니다.
담대한 전도에 도전합시다. 격렬한 반대가 있어도 성령님을 의지하고 두려워 맙시다. 우리를 자극하고 모함하고 위협해도 태연하고, 평화롭게, 사랑과 축복을 멈추지 맙시다. 이런 한 사람의 승리가 교회의 승리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