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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강 : 사도신경-죄사함, 부활, 영생(1)

몸의 부활과 영혼불멸 가운데 무엇을 믿으시나요?


 우리는 매주 사도신경을 통해서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입술로는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 머리로는 몸의 부활을 믿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전제부터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부활의 전제는 몸의 죽음입니다. 불멸이라는 개념은 부활이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기 때문이고, 또한 불멸이라는 속성은 오직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특성이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몸의 부활과 영혼불멸이 양립할 수 없는가?”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다양한 신학적인 논의들이 있지만 결론만을 이야기하면, 영혼과 몸이 통합된 인격개념으로 인간을 이해할 때 영혼불멸과 부활 신앙의 통합이 가능한데, 그 이유는 부활 신앙의 핵심이 모든 인격은 죽음을 넘어 존속한다는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해서 유월절 어린 양과 같이 모든 백성의 죄를 대신 담당하고 피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닙니다. 죄의 권세만 깨뜨리신 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심으로 죽음의 권세도 깨뜨리셨습니다. No Cross, No Crown이라는 표현처럼,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인 동시에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끝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 부활의 주님을 우리는 그리스도로 성자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56문 : “죄사함”에 관하여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


 답: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와 내가 일평생 싸워야 할 나의 죄악된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셔서 결코 정죄함에 이르지 않게 하십니다.
 종교개혁 전통에서는 이신칭의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죄사함”에 이르는 구원의 방편이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강조해 왔습니다. 이신칭의라는 표현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말인데, 흥미롭게도 죄사함에 대해서 설명하는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56문에 대한 답에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언급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사함과 믿음과 구원의 관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다고 보면 더 좋겠습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죄사함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의 문제로 환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소유한 나에게 주도권이 있는가, 은혜를 베푸시는 성부 하나님에게 있는가, 성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성자 하나님에게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죄사함을 기억 그리고 은혜와 연결시킵니다. 죄사함의 첫 번째 의미는 성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죄악된 본성을 기억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 의하면 우리가 죄사함을 받은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로는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기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온 인류를 대신하는 속죄제물이 되시고 피흘리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우리가 믿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전히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신 결과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와 내가 일평생 싸워야 할 나의 죄악된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십니다.”
 죄사함의 두 번째 의미는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셔서 결코 정죄함에 이르지 않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선물로 주어진 이유는 ‘믿음’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나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표현입니다. 물론 비유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의를 선물로 주셨다는 말”과 “의롭다고 인정하셨다”는 표현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미묘한 차이가 있는데, 교리사에서는 17세기 루터파 안에서 ‘칭의’를 지지하는 그룹과 ‘의화’를 지지하는 그룹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칭의와 의화가 어떤 차이가 있기에 논쟁을 벌였던 것일까요?
 이른바 ‘칭의’는 ‘법정칭의(jusficatio forensic)’라고도 하고 ‘법정적 이신칭의’라고도 하는 개념을 가지고 구원을 설명합니다. 법정적 이신칭의란 법정에서 재판장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변호사의 변론을 듣고나서 판사가 무죄를 선언하는 것을 말하는데, 칭의의 개념에 비추어보면 그리스도인은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 됩니다. 말하자면 내면이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의의 겉옷을 입은 상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의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간 안에 일어나는 내면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죄인에게 주입되어 의롭게 된 것을 말합니다. 칭의와 의화의 차이는 내면의 변화에 있습니다. 칭의나 의화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데, 구원받았으면 되었지 뭘 그렇게 따지는 걸까요?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받아서 이제 그 의가 나의 의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무죄판결을 받고 죄인인 동시에 의인이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면이 변화되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만을 놓고 보면 칭의든 의화든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받은 이후의 삶입니다. 칭의가 내면의 변화가 없이 옷만 갈아입은 그리스도인을 의미한다면, 오히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이고 외식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 교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다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는 것인데, 전제가 간과되고 있습니다. 그 전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2:20 (개역개정)



 하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와 일평생 싸워야 할 나의 죄악된 본성을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 때문이지, 나의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무엇이고, 믿음의 자리는 어디일까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것이 전제입니다. 동시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자리는 구원받은 이후의 삶의 자리라는 것을 기억하고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적이 없어 여전히 자아가 살아 있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버리기는커녕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통해서 믿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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