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추절 신앙의 첫 번 요소가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고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려 감사하는 것이라면 둘째는 감사한 마음으로 선한 사역에 참여하고 헌신하는 믿음입니다.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이나 모두 농경사회의 절기인데 오늘 이 시대에도 지키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질문이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각종 절기를 지키도록 가르치신 그 근본 제정 정신이 중요하고 우리에게 이런 날들을 명령하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림 또한 중요합니다. 이 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말씀이 광야에서 주어졌고 가나안에 들어가면 반드시 지켜야 할 절기로 규정되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하여 모든 수고가 끝이 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나안에 도착하자 그들이 마주한 가나안 땅의 상황은 다소 실망스러웠고 한편으로는 많은 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안식일을 비롯한 각종 절기를 명령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도록 가르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의 인종말살 정책에서도, 홍해의 바닷길 속에서도, 죽음의 광야를 지나면서도 살아남았습니다. 생존을 유지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존재 자체가 축복이었습니다. 때문에 절기를 지키는 믿음은 우리의 현실 자체를 은혜로 알고 존재와 생존 자체를 축복으로 여기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비록 우리 현실이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지만"(빌 3:12) 그래도 현재의 나의 나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는 것이 맥추절 신앙이요 절기를 지키는 믿음입니다.
1. 첫 이삭을 드려라
하나님은 곡물의 첫 이삭을 맥추절 예물로 바치라고 하십니다.(10절) 성경은 첫 열매를 언제나 하나님의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출 23:19, 34:26) 이 말씀들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신앙고백과 첫 열매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면 다음의 모든 열매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성경 역사를 보면 첫 사건들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처음 만난 시련이 마라의 물 사건이었습니다. 광야길 사흘 째 물이 없어 고통을 당할 때 겨우 찾은 마라의 쓴 물에 하나님은 나뭇가지를 던져 마라의 물이 단물이 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앞으로 만나게 될 광야의 쓰디쓴 현실들을 극복하는 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뿐임을 가르치는 첫 사건이었습니다. 첫 열매, 첫 사건, 첫 자식 등은 그렇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 것은 모든 것의 대표이며 동시에 첫 것을 바침은 모든 것을 드린다는 헌신의 의미를 포함합니다.
하나님은 첫 곡식 단을 바칠 때 번제물도 함께 드리라고 하십니다.(12절) 번제란 제물 된 동물의 모든 것을 불태워 남김없이 하나님께 바치는 헌신 제사입니다. 때문에 맥추절의 신앙은 모든 것이 은혜이며 모든 것을 감사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의 신앙입니다.
2. 헌신하라
“제사장은 그 첫 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마리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서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이니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20절).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드리는 날 제사장들에게도 감사하자는 것은 공직자들에 대한 격려와 위로를 통해 하나님의 일에 함께 참여하고 헌신하자는 의미입니다. 당시의 제도는 유일한 공직자들인 제사장들에게 재산소유와 권력사용이 금지되었습니다. 제사장들은 항상 낮은 자리에서 온갖 궂은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이 재산을 소유하고 권력을 남용할 때마다 역사가 퇴행했고 사회는 부패가 만연해졌습니다.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백성들이 사랑과 정성으로 제사장들을 섬기게 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맥추절 섬김이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을 때 국가의 모든 조직이 와해되어 백성들을 돌보고 살필 기능이 나라에 전혀 없었을 때 오히려 교회는 서둘러 전국적으로 조직을 만들고 백성 돌보는 일을 자임했습니다. 이 당시 진정으로 백성들을 보호한 유일한 공직자들이 교회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너무 가난했습니다. 도와야할 가난한 백성들은 너무나 많은데 교역자들조차 일용할 양식이 없었습니다. 모두가 가난하니 헌금을 강요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 시절 우리 할머니 어머니들이 만든 제도가 성미였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을 때 쌀과 잡곡을 한 줌씩 따로 떠서 주머니에 모았다가 주일에 교회로 가져가 모든 성도들이 가져온 곡식을 모두 모아 교역자들의 식량으로 드렸습니다. 그 양식으로 식사를 하고 목사님들 전도사님들이 교회 일도 하고 마을 일도 하시면서 전도하고 백성들 살피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맥추절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위해 모두가 정성으로 참여하는 헌신의 신앙이 맥추절 신앙입니다. 맥추절 신앙의 첫 번 요소가 모든 것이 은혜임을 고백하고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려 감사하는 것이라면, 둘째는 감사한 마음으로 선한 사역에 참여하고 헌신하는 믿음입니다.
3. 나누어라
맥추절을 지키는 세 번째 모습은 추수 때 모든 곡식 다 거두지 말고 일부를 남겨두고,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지 말고, 포도원의 열매도 다 따지 말고 남겨두어서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들의 양식이 되게 하라는 말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씀들과 규정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국가제도가 가난한 백성들을 돌볼 수 없던 시절에 백성들 스스로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자발적 나눔을 실천하도록 만들어주신 규정들입니다. 민간 스스로 실천했던 일종의 사회보장제도였습니다. 구약성경은 특히 가난한 이웃들, 고아와 과부들, 외국인 거류민들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보호 장치를 율법으로 규정하여 실천하게 했습니다. 이를 통해 극한 위기에서 최소한의 보호가 가능하도록 사회 안전망을 만들고 특히 이런 명절 때 섬김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21세기에 극단적 보호대상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고도의 자본주의사회로 갈수록 앞으로 경제적 양극화는 더 심화될 것입니다. 어떤 사회적 변화가 오고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져도 이런 현상은 지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말씀처럼 ‘가난한 자들이 항상 우리와 함께 있는 안타까운 세상의 모습’이 지속될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신앙의 공공성, 즉 우리의 공적 신앙이 더욱 절실하게 요청됩니다. 하나님은 맥추절을 지키는 성도들에게 신앙인의 사회적 책무를 다 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홀로 힘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이웃들에 대한 격려와 위로 그리고 최선의 나눔을 실천하도록 당부하십니다. 이것이 맥추절 신앙으로 사는 자세입니다. 이런 배려, 섬김, 위로, 격려가 있는 신앙이 세상이 교회를 바라보는 시각에 변화를 불러오고 복음이 더욱 활발하게 증거 되게 하는 결실로 이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