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의 자아인식과 태도로 이웃을 대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가 사랑의 시작입니다. 겸손은 자기 낮춤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입니다자기를 낮추고 이웃을 존중하는 겸손한 자세에서 참 사랑은 출발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평화인 샬롬은 단순히 폭력이 멈춘 상태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 속에 긴장과 대결 의식이 사라진 공존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이 평화를 약속하셨고 평화를 축복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에도 주님은 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고 하셨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 곁에 나타나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평화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습니다. 사랑과 정의의 실천입니다. 정의가 없는 사랑은 무례함과 혼돈을 초래하고 무질서가 난무하게 됩니다. 반면 사랑 없는 정의는 사회적 폭력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18세기부터 시작된 근대화의 과정에서 많은 이념들이 등장했습니다. 모든 이념들이 인류사회의 새로운 살 길과 행복의 길을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이념도 사랑이 배제되었을 때 모두 폭력적으로 변했고 수많은 숙청과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사랑을 만날 수 없습니다. 단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 참 사랑을 만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7절에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 했고 8절에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사랑의 실체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1. 하나님 사랑은 겸손입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의 자세이며 사람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 모든 태도의 근본은 겸손에서 비롯됩니다. 사랑이 겸손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집착이 되거나 자신이 자비와 지혜를 베푸는 듯한 교만으로 변질되기가 쉽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라고 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여기서도 예수님의 겸손을 만나게 됩니다.(막 10:17-18) 사도 바울은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롬:10)고 했습니다. 바울은 매우 엄격한 분이어서 자기 관리에 철저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은 결코 의인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 3:18)와 같고 죄인의 괴수(딤전 1:15)라고 했습니다.(롬 3:10) 이런 자기 겸손의 자세는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이해하게 만듭니다.
나도 부족한 사람이요 하나님 앞의 죄인이라는 겸손한 자기 발견이 있어야 다른 사람들의 실패를 이해하는 사랑과 포용이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결코 사람 위에서 군림하지 않으셨고 일방적인 비난과 정죄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고정된 인격체로 보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리 비난받을 일을 한 사람에게도 평생 그렇게 살 사람으로 결코 보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자처하셨습니다. 겸손하지 못하면 사람이 무례하게 됩니다. 무례한 것, 예의에 어긋난 것은 범죄라 하긴 어려우나 주변 모두를 매우 불쾌하게 합니다. 겸손한 자아인식과 태도로 이웃을 대하고 하나님 앞에 서는 자세가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을 교회일치의 원리로 제시하시면서 겸손의 표본으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겸손은 자기 낮춤이며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입니다. 자기를 낮추고 이웃을 존중하는 겸손한 자세에서 참 사랑은 출발합니다.
2. 하나님 사랑은 실천입니다
본문 9, 10절은 하나님 사랑을 두 가지로 설명하는데, 첫째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우리에게 보내신 것이요, 다른 하나는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으신 일입니다. 즉 구유에서 탄생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탄생과 죽으심이 이론과 명상 속에 환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일어난 일이며 역사적 사건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사람되게 하셔서 이 세상에 오게 하신 것이나 그가 세상에 계신 것은 허구이거나 신화가 아니라 역사였습니다. 이단들이 세상에 나타났는데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3절) 예수님의 역사성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예수 사건은 그가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신 역사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도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 사랑은 실천 현장이 있는 현실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가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이며, 그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역사이며 실천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이 실천 현장이 없는 사랑을 가리켜 우리는 종교적 위선이요 허위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1절).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사랑을 실천하셨으니 우리도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성경은 구약에서부터 사랑과 정의의 실천을 매우 중요하게 가르쳤습니다.(신 26:12) 하나님은 3년에 한 번은 모든 소산의 십일조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들에게 나누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랑의 실천이 성경의 정신이요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3. 성령의 도우심으로
여러 사람들의 헌신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두 번째 성전이 완공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성전의 규모가 왜소하다며 크게 실망했습니다. 옛 성전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사랑의 실천이 하나님 사랑의 참 모습이요 우리의 신앙이 역사 현장에서 실제의 삶으로 이어질 때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우리는 힘써 하나님 사랑의 실천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쉽지 않습니다. 각자 삶의 형편이 다르고,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래가 있고, 또 이기심이라는 원죄에 가까운 타락한 본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버려두면 언제나 이기적 본능의 욕구대로 회귀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St. Augustinus는 이기심을 원죄에 가장 가까운 죄라고 했습니다. 언제나 부패와 충돌과 갈등이 있는 곳에는 이기심이 뿌리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는 성령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13절)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신앙에 대한 바른 인식을 할 수 있고, 신앙을 실천할 능력도 생깁니다. 갈라디아서는 성령의 열매 9가지를 열거하면서 첫 번 열매로 사랑을 말씀합니다.(갈 5:22) 사도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고 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난무하는 욕심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런 거친 문화 속에서 배려와 긍휼과 포용을 실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과제입니다. 그래서 이런 현실을 극복하고 용서, 긍휼, 관대함, 포용 등이 넘치는 사랑의 관계를 만드는 것에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입니다. 성령의 다스리심으로 살아갑시다. 성령께 순종하고 성령의 감동을 소멸하거나 대적하지 맙시다. 언제나 성령 친화적 삶을 유지합시다. 그래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세상을 구원하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도 사랑의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겸손합시다.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리고 성령 충만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는 교회와 성도의 모습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