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생긴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일상에서 흔히 일어나지는 않지만, 두 사람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겨서 갈등이 생기는 경우에 갈등을 중재하기 위해서 제3자가 나서는 일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나서 문제가 생기면 그 사건을 조정해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10여 년 전에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형편이었고, 교통사고가 나면 목사도 신부도 없다는 말도 있었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차량에 차량용 CCTV 또는 블랙박스가 설치되면서 보험사에서는 차량용 블랙박스를 확인하고 교통사고의 중재인 역할을 합니다.
영화와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면, 교통사고를 일부러 내는 사람은 거의 없기에 대부분 교통사고 가해자들도 자신은 잘못이 없다고 우깁니다. 상황 판단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든지, 또는 습관을 좇아서 했을 뿐인데 돌발 변수가 생겼든지, 그것도 아니면 교통법규를 정확하게 숙지하지 못하고 있었든지 상관없이 일단 사고가 나게 되면 경찰서와 보험사에 전화해서 사고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이때 교통경찰과 보험사 사건조사 담당자가 사고 현장에 투입되어 사건을 조사하고 누가 피해자인지 누가 가해자인지 또는 쌍방 과실인지, 쌍방 과실이라면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책임이 있는지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중재 역할을 합니다.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문제와 관련된 당사자들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책임 정도를 조정해 주는 보험사의 역할을 하는 존재가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필요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문제 곧 우리의 영혼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중보자의 필요성에 대해서 다루는 12-15문까지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2문: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고 영원히 형벌을 받아 마땅한데,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
답: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의가 만족되기를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든 아니면 다른 이에 의해서든 죗값을 완전히 치러야 합니다.
중보자의 필요성에 대해서 다루는 첫 번째 질문인 12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전체 흐름을 짚고 넘어가겠습니다. 교통사고의 비유로 다시 돌아와서 설명하면, 교통사고를 내서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에 피해를 입힌 사람이 처벌당하는 것이 마땅한데 안전장치로 보험을 들어놓는 것과 마찬가지로, 타락한 인간을 율법의 요구에 따라 처벌하는 것이 마땅한데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하셨습니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다른 이에 의해서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 “다른 이”를 중보자 또는 구원자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에 의해서 죄인은 유죄판결을 받고, 의인은 무죄판결을 받습니다.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죗값을 치루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요? 물론, 형벌을 피하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은혜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12문에서는 “어떻게 이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질문을 통해서 형벌을 피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열어놓고 있습니다. 죗값을 치루는 것은 의에 관한 문제이고, 누군가가 대신 치를 수 있도록 길을 열어놓은 것은 자비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죄인 자신이 죗값을 치러야지, 죄인이 치러야 할 죗값을 다른 이가 치른다면 이것 또한 불공평한 일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럴듯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공평과 불공평의 기준은 의로우신 하나님의 몫이고 하나님이 결정할 문제이지, 죄를 지은 인간 자신이 따지고 결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죄인이 스스로 자신의 죗값을 다른 사람이 치르도록 해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백번 양보해서 논리적으로는 질문이 타당하다고 인정해 보겠습니다. 다른 이가 죗값을 치르는 일이 불공평한 일이라고 한다면, 과연 누구에게 불공평한 일이라는 말인가요? 죄인에게는 불공평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불공평한 일일까요?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도 불공평한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더 불공평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은 죄인을 대신해서 죗값을 치르는 “다른 이”입니다. 다른 사람이 짊어져야 할 죄에 대한 책임을 내가 대신 맡게 되었다는 것을 상상만 해도, 이는 너무나 억울하고 힘든 일입니다. 죄인을 대신해서 죗값을 치르는 “다른 이”에게 불공평한 일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다른 이”가 대신해서 죗값을 치른다고 한들, 또는 죄인 스스로가 죗값을 치른다고 한들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불공평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죗값을 치르었는데 하나님의 의가 만족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죗값을 치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아무나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해서 죗값을 치를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13문: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까?
답: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죄책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기준이 너무 높다는 말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능력이나 자격이 절대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높다는 말은 절대적인 기준이 있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의 능력이나 자격이 부족하다는 말은 능력이 되고 자격이 되는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부언하자면,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을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되고 자격이 되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외에는 어떤 경우이든지 우리가 스스로 죗값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는 없습니다. 또한 “다른 이”가 죗값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아무나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나 다른 이가 죗값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상황은 마치 상황 파악이 잘 안되는 신병이 고참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심에 무언가를 열심히 해보는 상황을 설정하면 설명이 쉬울 것 같습니다. 아직 모든 것이 서툴고 어설퍼서 아니면 머리가 나쁘고 부지런해서, 결과적으로는 사고만 치고 다녀서 뒤치다꺼리 하느라 더 짜증나게 만드는 것과 같은 상황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로마서 2장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로마서 2:5-6, 개역개정판).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그 어떤 행위로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