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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강: 인간의 본성 (2)

8문: 그렇다면 우리는 그토록 부패하여, 선은 조금도 행할 수 없으며 온갖 악만 행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까?


 답: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는 한 참으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고 또 만드신 사람을 보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교만한 마음으로 불순종한 결과 본성이 부패하여 선한 본성이 악한 본성이 되었습니다. 본성이 부패하였다는 말은 타락하였다는 말로도 표현하는데, ‘부패’나 ‘타락’이나 모두 ‘온전한 상태’를 전제로 하고 있는 단어라는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온전한 상태 곧 선한 상태에서는 스스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불순종한 결과로 부패하고 타락하게 된 상황에서는 스스로 선한 일을 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마치 자신이 운전을 잘 하니까 괜찮겠지 하는 교만한 마음으로 교통신호를 어기고 불법으로 좌회전을 하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차와 정면으로 부딪혀 엔진이 주저앉아 폐차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차와도 같이 되어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게 된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기에 견인차가 와서 끌어가지 않으면 움직일 수가 없게 된 것과도 같이 스스로는 선을 조금도 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 불순종으로 타락하고 부패하게 된 인간의 본성입니다.
 폐차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이 망가진 상태의 차를 만든 회사에서 견인해 가서 엔진도 바꾸고 프레임도 바꾸고 필요한 모든 부품을 바꾸어서 사고난 이후에 견인차에 끌려왔을 때의 모습 뿐만 아니라 사고 이전의 모습 마저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차가 된 상황을 가정해 보면 어떨까요? 이와 같이 변화된 상태를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8문답에서는 성령으로 거듭난 것으로 표현하고, 요한복음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났다고 표현합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조금도 행할 수 없고 악만 행하는 성향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부패 또는 타락으로 표현하는데, 신학사상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 ‘타락’이나 부패의 상황이나 정도에 대해서는 신학자들마다 입장의 차이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범죄하여 타락했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정도에 있어서 완전히 폐차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과 같이 완전히 타락했다는 주장과, 반대로 속도를 낼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정비소까지 갈 수 있을 정도로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니라는 주장으로 나누어집니다. 과일의 부패로 비유하자면, 완전히 썩어서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는 주장과 반 이상이 썩었으나 썩은 부분을 도려내어도 1/5 정도는 먹을 수 있다는 주장으로 나뉘어집니다. 이러한 차이를 두고 생긴 논쟁의 핵심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은혜 사이의 긴장관계입니다.
 이 논쟁에서 전통 및 정통으로 인정받은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로는 선을 행할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만 선을 행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은 모두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지닌 심각한 죄성을 주목하였습니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젊은 시절에 마니교에 빠졌었던 경험이나 사생아를 낳아 키웠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난 이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니 선을 행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고 죄악을 즐기기까지 했던 모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어린 시절 배밭에서 배도둑질 했던 일화을 떠올리며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내가 도둑질을 하게 된 것은 배가 고파서도 아니요 궁핍해서도 아니요, 다만 착한 일을 무시하고 싶고 또한 죄를 짓고자 하는 강한 충동에 어찌할 수 없어 범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내가 이미 더 좋은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훔치게 됩니까?
 아우구스티누스, 선한용 역, 『고백록』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15), 83.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인간의 원죄를 강조하는 전통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서 확립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다음의 4가지 상태로 나누어서 설명합니다:타락 전에는 죄를 지을 능력이 있는 상태(posse peccare), 타락 후에는 죄를 안지을 능력이 없는 상태(non posse non peccare),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는 죄를 안지을 능력이 있는 상태(posse non peccare), 하나님 품에 안긴 이후에는 죄를 지을 능력이 없는 상태(non posse peccare). 타락한 인간은 죄를 안지을 능력이 없는 상태에 놓여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정리


 중국 사상사에서 성선설과 성악설 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사상사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있었습니다. 고대 교회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펠라기우스 간의 논쟁으로, 종교개혁사에서는 칼뱅과 아르미니우스 사이의 논쟁으로 쟁점화되었습니다. 이 논쟁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 논쟁처럼 보이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신학적으로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서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전제로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구원받은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늘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간과하기 쉬운 문제는 인간의 책임성을 강조하는 입장은 타락한 상태의 인간을 문제삼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활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문제삼는다는 점입니다.
 간혹 이미 끝난 논쟁인 인간의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는데, 이럴 때 인간의 원죄가 유전된다고는 것을 전제로 하면 많은 신학적인 문제가 해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실 때 본성을 선하게 창조하셨는데, 유혹을 받아 교만한 마음이 들어가고 자유의지를 그릇되게 사용하여 불순종의 죄를 짓게 되어 본성이 변하게 되었고, 그 원죄가 유전이 되어서 최초의 사람 아담 이래로 온 인류가 죄 아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 보기에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하여도 그 행위로 구원받을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 본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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