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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복음화운동
 한국교회가 급성장한 것은 1970-80년대의 일이다. 이때 한국교회는 전도와 성장에 전력을 기울였다. 1964년 11월, 17개 교파의 대표들이 1965년에 대대적인 초교파 전도운동을 펼치기로 합의했고 그 결과 12월에 감리회의 홍현설 박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전국복음화운동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민족복음화운동’의 시작이다. 민족복음화운동은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를 슬로건으로 삼고 전도훈련, 부흥회, 전도집회, 노방전도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에 나섰다. 1960년대 후반에는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전군신자화운동이 일어나 군대에서 매년 대규모의 세례신자가 생겨났다.
 1970년대에는 각 교파가 교회성장을 정책으로 채택했다. 우리 교단이 ‘매년 300교회 개척’을, 장로회 합동은 1만 교회, 감리회는 5,000교회 100만 신도, 성결교회는 1만교회 300만 신자, 기독교장로회는 2,000교회로 성장할 것을 결의했다. 미국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에서 발전한 ‘교회성장이론’이 때마침 한국에 들어와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이론은 사회적 현상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장했는데 아노미 현상을 집단적인 전도를 위한 기회로 삼자는 이야기는 한국에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일이었다. 당시 한국은 군사독재와 급격한 산업화로 아노미 현상이 심각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평신도 전도훈련과 동원, 교회 밖 선교 기관과 연계, 대중문화의 적절한 이용 등 교회성장이론의 방법론은 한국교회에 폭넓게 적용되었다.
 파라처치운동 단체들도 교회와 함께 복음화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1950년대 조직된 한국기독학생회(IVF),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학생신앙운동(SFC), 1960년대의 네비게이토(Navigators), 대학생성경읽기선교회(UBF), 1970년대 예수전도단(YWAM) 등의 대학 선교단체들은 민족복음화운동의 주역이었다. 이 단체들에서 체계적인 성경공부와 신앙훈련을 받은 청년들이 민족복음화의 꿈을 품고 열정적으로 활동한 것은 한국교회 전체의 활력이 되었다. 그리고 CCC가 개발한 ‘사영리’, 네비게이토가 개발한 ‘브릿지’ 같은 전도지는 교회에서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1973년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전도집회, 1974년 EXPLO 74, 19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 1980년 ’80 세계복음화대성회로 이어지는 대규모 대중전도집회는 민족복음화운동의 절정이었다. 17개의 교파가 연합으로 개최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는 한경직 목사가 대회장을 맡았고 김장환 목사가 설교 통역자로 빌리 그래함의 설교를 전했다. 참석 연인원은 120만 명이었고 결신자는 17,703명이었는데 당시로서는 역대 최대 규모였다. 하지만 이 기록은 이듬해 바로 깨졌다.
 EXPLO 74는 우리에게 CCM가사로 익숙한 김준곤 목사의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문구를 표어로 삼았다. 대회의 주최는 CCC였고 정부와 서울시가 지원했다. 정부는 여의도의 통금을 해제하고 군용 천막과 운송수단을 제공하였다. 서울시는 상수도 위에 임시 수도꼭지를 설치해 참가자들의 세수와 목욕이 가능하게 하였다. 대회 기간 중 보이스카우트와 걸스카우트가 매일 500명씩 동원되어 안내를 맡았고, 대한적십자사가 미아보호소를 운영했다. 임시 우체국, 임시 소방서, 임시 파출소까지 설치될 정도로 EXPLO 74는 정부의 큰 협조를 얻었다. 그 결과 참석 연인원 655만 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결과를 보였다. 그러나 이 대회는 교회의 연합은 잘 보이지 않았고 김준곤을 비롯한 몇 인물의 주도성이 드러났다. 이 대회는 지나치게 친정부적이라는 비판을 국내외에서 받았다. 73년 한국을 방문해 철저히 종교적 메시지만 전달했던 빌리 그래함이 EXPLO 74의 주강사였던 국제CCC의 빌 브라이트(William R. "Bill" Bright)가 독재정부를 두둔하는 정치적 메시지를 설교에 포함했다고 비판하면서 둘 사이의 설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1977년 민족복음화대성회는 다시 교회 연합으로 진행되었다. 32개의 교파가 연합하였고 600여 명의 강사가 말씀을 전한 이 대회도 역시 수백만의 참가 연인원을 보였다. 말 그대로 “맘모스 집회”가 연이어 성공하자 한국교회는 큰 자신감을 얻었다. 1980년의 집회가 민족복음화가 아닌 세계복음화로 명칭을 바꾼 것은 이런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이 시기 한국교회는 말 그대로 ‘유례없는 성장세’를 보였다. 각 교파들은 자신들이 세운 목표치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크게 성장하였다. 예를 들어 감리회는 1975년부터 10년 동안 자신들의 목표치에 약 40%를 달성하였는데 그것만으로도 약 두 배의 성장이었다. 민족복음화운동은 한국사회에 한국기독교의 역량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혼란한 사회 속에 지쳐있는 이들을 위로하고 많은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독재정부와 유착된 열광적인 신앙 집회가 신음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소리를 묻어버렸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고, 교세가 급성장하고 대형교회가 등장하면서 교파 내부나 기독교 전체의 결속력과 협력관계가 약화되는 부작용도 낳았다. 그럼에도 민족복음화운동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한국교회가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역동적인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였다. 지금도 한국교회는 세계에서 인구 대비 선교사 숫자가 가장 많은 교회이다. 민족복음화운동이 세계복음화로 이어진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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