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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여성운동과 여성안수
한국교회의 시작은 곧 한국 여성의 권리 신장과 맞닿아있다. 기독교 선교가 여성교육과 여성의료, 여성전문직 양성에 선도적인 역할을 하자 한국의 여성들은 비로소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많은 기독교 여성들이 일제강점기에 한국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계몽운동, 절제운동, 농촌운동, 그리고 민족독립을 위한 투쟁에 헌신한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기독교 여성들의 활동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였던 이태영은 1956년 여성법률상담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열었고 남성 중심의 법률 개정운동을 벌였다. 가족법 개정운동, 호주제 폐지 운동, 동성동본 금혼령 폐지 운동이 그에게서 출발했다. 그런데 가족법의 개정은 1989년, 호주제의 폐지는 2005년에 실현되었다. 참 긴 시간이었다. 50년의 세월 동안 이 운동이 중단되지 않았던 것은 이 운동의 핵심에서 지치지 않고 활동했던 기독교 여성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이었던 이태영은 YWCA와 깊은 교분을 갖고 있었고 그에게 기독교 여성은 든든한 동지였다.
기독교 여성 단체들은 하나님이 남성과 여성을 동등하게 창조하셨음을 믿고 여성의 법적 지위 향상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YWCA는 여성들에게 제대로 된 직업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1960년대 중반, 식모를 파출부라는 출퇴근하는 직업으로 전환하는 일에 착수한 이후 꾸준히 여성 직업을 개발했다. 감리회의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우리 교단의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와 청주도시산업선교회는 1970년대 여성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다.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여성들은 1980년대부터 미군기지 인근에서 이른바 ‘기지촌 여성’을 보호하기 위해 활동했다. 기지촌 여성은 당시 한국사회에서 가장 천시 받던 여성이었다. 1986년 기장의 여성 지도자들이 힘을 모아 개소한 두레방(My Sister’s Place)은 당시 기지촌 여성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되찾고 건강한 삶을 살도록 돕는 유일한 단체였다. 기독교 여성들은 엘리트 계층의 여성들이 느끼는 유리천장의 문제부터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인 여성들의 생존과 존엄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해 오고 있다.
그런데 사회가 빠르게 남성과 여성의 동등한 권리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교회는 계속 뒤처지고 있었다. 1955년 감리회가 전밀라와 명화용, 두 명의 여성에게 목사안수를 준 이래 1970년대까지 다른 주요 교단에서는 여성의 안수가 금지되고 있었다. 아무리 한국사회가 가부장적이라고는 하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초대 내각에도 여성(임영신, 상공부장관)이 있었고 앞서 언급한 이태영이 1952년 판사로 추천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여성이기 때문에 어떤 분야에서 원칙적으로 배제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유독 교회는 여성에게 배타적이었다.
감리회를 제외하면 가장 먼저 여성에게 안수를 허용한 것은 기장이었다. 그러나 기장도 1956년 여성장로제를 도입하면서도 여성 목사 안수는 금지하였다. 기장이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준 것은 1974년이었다. 1957년 총회 안건으로 여성목사 안수가 상정되었지만 2년 넘게 연구한 결과 ‘원칙적으로 승인하는 것이 가하나, 그 규정과 정체는 계속 연구하기로’ 하면서 보류하자 한동안 청원은 수그러들었다. 그러다 1968년 1월 기장 여교역자협의회가 발족하면서 다시 여목사제도 청원이 시작되었다. 1969년과 71년 두 번의 투표에서 부결된 이후 1974년 총회에서 교단 헌법에 목사의 자격으로 기술된 “35세 이상된 사람”의 ‘사람’이 남성과 여성을 모두 포함한다고 확인하면서 별도의 투표 없이 여성이 목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어찌 보면 그저 여성도 사람임을 확인하는데 2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린 것이다.
우리 교단은 1961년부터 여성안수가 논의 되었다. 여성들은 거의 매년 총회에 여성안수를 청원했고 14번의 투표가 있었다. 무려 13번 부결된 셈으로 14번째 투표가 있었던 1994년에 이르러서야 여성안수가 통과되었다. 첫 논의에서부터 33년이 걸린 여정이었다. 여성들이 줄기차게 여성안수를 청원할 수 있었던 것은 여전도회전국연합회가 이 일에 발 벗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전국연합회는 설문조사, 세미나, 토론회, 좌담회, 호소문 배포, 신문 기고, 총대 설득 등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여성안수를 위해 노력했다. 여기에 1987년 여교역자회가 발족하면서 여성 전도사들도 목소리를 본격적으로 내기 시작했다. 1988년 총회 당일에는 여교역자 20여 명, 여신학생 170명을 비롯하여 이웃 교단의 여성 교역자들 20여 명도 함께 피켓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1989년 총회에서는 찬성 377, 반대 375로 찬성 수가 더 많았음에도 과반이 되지 못해 부결되었고 1991년 총회에서는 여성안수가 부결될 경우 3년 간 헌의 불가를 결정하고 551대 620으로 부결되면서 3년 동안 헌의 제한에 걸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3년의 제한이 풀린 1994년 총회에서 비로소 701대 612로 여성안수가 허용되었다. 1994년에는 전국 51개의 노회 중 24개 노회가 여성안수를 청원하면서 교회 내의 남녀평등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임을 확인하였다.
이후 1999년 대한성공회, 2003년 예수교대한성결교회, 2004년 기독교대한성결교회, 201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백석, 2013년 기독교한국침례회이 여성안수를 결의하였다. 작년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에서 처음으로 여성안수 공청회가 열렸고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에서도 4개의 노회가 총회에 여성안수를 청원하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는 2023년 5월 25일 목사안수식이 있었는데 이날 안수를 받은 49명 중 47명이 여성이었다. 더디더라도 교회는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교단이 여성안수를 금지하고 있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우리 교단도 갈 길이 멀다. 우리 교단의 여성교인 비율은 57%이다. 그러나 2023년 총회의 여성 총대 비율은 2.7%였다. 턱없이 부족한 수치로 여전히 우리 교단과 교회에 여성에 대한 차별의식이 강하게 남아있음을 반증한다. 교회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평등하다는 사실 위에 서 있으며 여성들의 헌신에 의존하여 운영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신학적으로도 현실적으로도 불합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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