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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말씀 요약
만남의 신앙
3월 25일(월)
죄인을 만나시는 하나님(창 3:9-21)

사람은 영적인 것을 갈급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이 찾는다고 찾아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찾아오셔야만 만날 수 있는 수동적인 존재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든 사람을 찾아오시고 만나주시고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주시며 그 증거들을 확증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가운데 범죄한 아담에게 제일 처음 찾아가셨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금지하였던 선악과를 먹었고 감히 하나님처럼 되고 싶다는 교만한 생각 때문에 범죄하고 타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회개하고 돌아가기 보다는 자신의 죄를 은폐하고 나무 뒤에 숨어 스스로의 노력으로 죄를 가리려고 하는 어리석은 시도를 계속하였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현재의 고통스러운 삶과 미래의 불안과 결국은 허무라고 하는 덫에 빠뜨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아담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창조세계 전체가 파괴되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는 무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들어진 완벽한 피조 세계였습니다. 그 세계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실 만큼 선한 가치를 가졌었고, 무한 가능성이 있는 세계였습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는 창조 세계의 이런 가치 체계를 다 흔들었고, 완벽한 하나님의 세계를 죄악이 난무하고 고통이 가득한 세계로 만들었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사람에게는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아담의 범죄는 감격과 기쁨과 축제가 되어야 할 인간의 삶을 고통과 눈물과 한숨으로 얼룩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땅도 저주를 받아 엉겅퀴와 가시를 내면서 인간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시며 그에게 여인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죄에서 건져내시는 구속의 역사를 예언하십니다. 하나님은 벗은 것을 부끄러워하는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시는 분이 아니시라 우리의 부끄러움을 가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가죽옷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동물의 희생이 필요합니다. 피 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장차 메시아가 세상에 오셔서 자기 피를 흘리시고 생명을 바치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가려지게 하실 십자가 희생을 예고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탓하시지 않으시고 책망하지도 않으시고 내가 너의 죄를 가리고 구원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하나님과의 만남이 행복한 삶의 새로운 출발이 되실 수 있기 바랍니다.

3월 26일(화)
버려진 자를 만나시는 하나님(출 3:1-12)

하나님께서는 호렙산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로 모세를 만나러 오시어 그로 하여금 애굽으로 가서 민족을 구원하는 큰 역사를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때 모세는 완벽하게 버려진 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동족들도 정치적 동지들도 그를 버렸고, 역사도 그를 버리고 외면했습니다.
모세는 장인에게서 독립하지 못한 채 광야에서 양치는 자로 더 이상 내려갈 데도 없는 비참하고 버려진 존재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이것은 애굽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호렙산 모세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은 스스로에 대해서 세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먼저는 ‘나는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모세 신앙의 적법성과 정통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버려지고 잊혀진 이스라엘을 구원할 분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시면서 모세를 개인적으로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의 이름을 부르신 것은 내가 너를 안다, 내가 너를 살피고 있다, 내가 너를 잊지 않았고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찾아오신 하나님은 우리를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환난과 눈물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서 있는 곳은 거룩한 곳이니 신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호렙산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거대한 바위 덩어리에 불과한 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땅이 거룩한 것은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비참하게 버려진 모세 역시 거룩한 삶으로 전환할 수 있는 것을 암시합니다. 후에 모세가 거룩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모세 자신의 능력이나 역량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 임재하신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 안에 있는 불신과 불만을 설득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며 애굽으로 갈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80세였지만 모세는 지난날의 상처를 극복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애굽으로 갔습니다.
우리도 때때로 스스로를 비천하게 생각하고 자부심도 긍지도 없어서 믿음에도 삶에도 회의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능력 많으심을 힘입게 하십니다.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모두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새로운 부르심에 대하여 막연한 감정, 두려움, 책임의 막중함을 내려놓으십시다. 그리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붙잡으십시다. 그리고 가라고 하시는 주님만 믿고 출발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3월 27일(수)
회개하는 자를 만나시는 하나님(레 1:1-9)

하나님과의 만남은 다양한 방법, 다양한 장소,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지지만 그중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예배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시간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시간이고, 하나님께 우리의 사랑과 정성을 바치는 경배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바른 예배를 드리도록 요구하십니다.(요 4:13)
구약에서는 예배를 제사로 표현했습니다. 레위기에서는 다섯 가지 종류의 제사를 말씀하시면서 1장에서 번제를 설명합니다. 번제는 여러 종류의 동물들을 제물로 삼아서 하나님께 불로 태워 바치는 제사입니다. 제물을 태울 때 나는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고, 제사가 향기롭다고 하는 것은 그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예배 가운데 임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번제를 드릴 때 제물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어떤 종류라도 흠 없는 것을 드리는 것이 첫 번째 원칙이었습니다. 이것은 예배가 향기롭게 되어서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가 되려면 예배자가 하나님 앞에 흠 없는 모습으로 서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흠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신앙고백에 흠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에 흠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믿음에 흠이 생기면 이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흠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믿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차이가 많이 생기면 위선자가 됩니다. 그래서 믿음에는 신행일치가 강조됩니다. 그런가하면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수행하는 일에도 흠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사명에 흠이 있으면 주님께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듣게 됩니다. 우리는 비록 온전할 수 없지만 우리 대신 온전한 제물이 되어주신 분을 깊이 의지하므로 하나님께 온전함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흠 없는 당신의 생명을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예배합니다.
또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물은 제물의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가죽을 벗기고 각을 떠서 전부를 바쳐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예배도 내 삶의 모든 것을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에는 몸이 와야하고 마음이 와야하고 정성이 와야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부분이나 조각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전부를 드리는 신앙으로 나아갈 때 예배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번제는 불로 태워서 냄새와 연기로 드리는 제물입니다. 번제는 모든 제물들이 소멸되어 가는 과정입니다. 번제는 제물로 바쳐지는 순간에 생명이 사라지고, 모든 살을 각을 뜨니 형체도 없어지고 마지막으로 불로 태워 냄새와 향기로 하나님께 바치므로 제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소제도 마찬가지입니다. 곡식을 고운 가루로 빻아서 바치기 때문에 번제든 소제든 제사는 자기 소멸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참으로 예배하는 사람은 자기를 앞세우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처럼 내가 아니요 모든 것이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진심으로 고백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육체와 정욕과 탐심을 못 박는 사람, 그 사람이 참 예배자입니다.

3월 28일(목)
어둠 속의 인생을 만나시는 하나님(요 1:1-12)

예수님은 온 세상에 구원이 되시고 빛이 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소개하면서 세상의 어두움을 밝히시는 빛으로 오셨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셨지만 사람들은 세상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였고 영접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둠 속에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옥,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 영적 무지에 빠져있는 상태, 혼란과 시험에 빠져있는 상태, 도덕적 부패의 상태, 죄악의 굴레 속에 있는 세상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두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창조 전 세상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고 흑암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수면에 운행하시고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생기고 광명이 찾아왔습니다. 원래 어두움은 빛이 비추이면 저절로 사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어두움은 물리적인 어두움보다 훨씬 더 악해서 빛이 오면 그 빛을 끄기 위해 악랄한 노력을 합니다. 이런 악한 세상을 밝히시기 위에 주님은 빛의 사명을 감당하시려 고난 당하시고, 희생 하시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빛이 없는 세상에 빛이 되셨고 소망 없는 세상에 소망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절망적인 인생에게 천국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은 '우리가 어떻게 세상에서 빛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원리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또 빛이 되시기 위해서 거룩한 용기를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한 용기란 세상에서는 손해를 볼지라도 기꺼이 하나님을 따르는 것, 옳고 선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은 “일어나자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 26:46)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옳고 선한 뜻을 위하여 거룩한 용기를 내며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들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앞에 다가올 운명이 어떤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계셨지만 그 길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한 용기는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한 것이며 특정한 사람이 아닌 사회적인 공동선을 위한 것입니다. 세상은 빛 되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그 빛을 끄려고 했지만 거기에 굴복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달리시는 자기 희생과 용기로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셨습니다.
이 아침 예수님은 우리에게 빛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총을 덧입고 그 사랑을 본받아 어둔 세상에 빛이 되기 위해서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희생과 거룩한 일들을 하기로 결심하는 담대한 용기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빛으로 오셔서 소망 없는 세상에 소망을 주시고 천국을 약속하신 빛 되신 주님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주님이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월 29일(금)
십자가를 찾는 자를 만나시는 하나님(요 19:38-42)

고난주간의 다섯째 날인 성금요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목요일 저녁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며 서로 사랑하라는 마지막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과 함께 감람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시다가 로마군에게 체포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새벽부터 이어지는 혹독한 재판을 받으시고 마침내 빌라도로부터 십자가 처형을 선고 받고 갈보리 언덕 위의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피흘리신 십자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줍니까? 십자가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십니까?
우리는 이번 고난주간에 ‘만남의 신앙’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만남’이라는 영어 단어가 여러 개 있지만 예수님과의 만남은 내면 깊숙이 만나고 이해한다는 의미로 ‘encounter’를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진실로 주님을 만나면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은 내 안에 거하시며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게 됩니다.
성경에도 이처럼 주님과 신령한 만남을 경험한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유심히 지켜보면서 예수님과 깊은 영적 연합이 이루어진 사람들 중에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렸던 다른 한 편의 강도가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나를 기억해 주소서’라고 애절하게 호소하였고, 예수님께로부터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는 은총을 힘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생의 마지막 절박한 순간에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나고 그 만남으로 인해 극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또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된 사람들 중에는 여러 명의 로마군의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먼저 예수님이 돌아가신 십자가 현장을 지휘하던 로마의 백부장은 예수님의 처형 장면을 본 후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셨다'라고 고백합니다.
가버나움의 백부장은 자기 집의 하인이 병들어 신음하는 것을 보고 예수님께 나아와 하인을 고쳐달라고 하며 주님이 내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으니 말씀만 하시옵소서 라며 그의 큰 믿음을 고백합니다.(눅 7장)
또 한 사람의 백부장은 가이샤라 고넬료입니다. 그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인근 욥바에 사람을 보내어 베드로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온 가족이 하나님이 말씀을 듣고 세례를 받음으로 이방인으로는 최초로 구원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후에 그는 가이사랴 교회를 지도하는 감독이 되어 주님께 헌신한 것으로 전해집니다.(행 10-11장)
또 다른 백부장은 바울이 재판받기 위해서 배를 타고 지중해를 지나 로마로 향할 때 바울의 호송을 책임졌던 로마의 백부장 율리오였습니다. 그는 바울의 호송을 책임졌던 사람으로 풍랑이 오자 오히려 바울의 조력자가 되어 배 안에 있던 사람을 모두 구조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행 27장)
이런 여러 백부장의 기사가 성경에 기록된 것은 예수님을 깊이 만난 모든 로마의 고관들은 구원을 얻고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음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또 한 사람,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고 큰 변화를 갖게 된 사람은 아리마대 요셉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역사의 전면에 나타나 당돌하게도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요구합니다. 그 엄중한 시기에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고자 하고 자기 가족들을 위해 예비해두었던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두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람을 존경받는 공회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는 예수님의 숨겨진 제자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돌아가신 예수님을 목격한 후 더 이상 자신의 신분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의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 모두에게 변화의 은총이 내려졌습니다.
성금요일, 우리 모두 주님을 영적으로 ‘encounter’ 하셔서 그분을 내 안에 모시고 내 가 그분 안에 들어가 주님을 깊이 만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시요,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하시는 주님이시요, 십자가의 주님은 우리를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게 하시는 능력의 원천이십니다. 이 주님을 깊이 만나시는 성금요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설교 요약 정리 허숙 권사(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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