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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기복신앙
 한국교회 신앙의 부정적인 모습으로 늘 지적되는 것이 지나치게 기복적이라는 점이다. 한국의 종교문화는 전통적으로 북방 계열의 샤머니즘에 강한 영향을 받는다는 지적도 있다. 모든 종교가 한국에 들어오면 이 북방 샤머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기복적으로 변한다는 이야기이다. 북방 샤머니즘은 만주·몽골·시베리아에 널리 퍼져 있던 세계관을 반영하는데 공통적으로 하늘에 대한 숭배가 나타난다. 천신 환인의 아들 환웅이 인간 세상에 내려와 곰과 결혼하고 단군을 낳으면서 우리 민족이 시작되었다거나, 고구려를 세운 주몽이 천신 해모수의 아들이라는 이야기가 우리 민족문화의 샤머니즘적 성격을 잘 보여준다.
 심지어 의학서적으로 알려진 '동의보감'에도 부적의 글씨를 쓰기 위한 붉은색 물감을 만드는 주사(朱砂)를 “정신을 기르고 혼백을 편안하게 하는데, 오래 복용하면 천지신명과 통한다”라고 설명할 정도로 샤머니즘은 우리 문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따라서 한국기독교가 외국의 기독교와 비교해 다소 기복적인 성격을 보인다면 그건 아주 이해하지 못할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한국기독교의 기복신앙은 그 정도가 매우 심각한 수준이다. 한국교회가 십자가 없는 부활, 무조건적인 축복만을 원한다는 비판이 나온 지 오래다. 이런 기복적 신앙이 결정적으로 한국기독교에 널리 확산한 계기는 한국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은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민간인의 피해가 큰 비참한 전쟁이었다. 1951년 미국의 의회 청문회에 출석한 맥아더 장군이 “평생을 전쟁 속에서 보낸 본관과 같은 군인에게조차 이러한 비참함은 처음이어서 무수한 시체를 보았을 때 구토하고 말았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전쟁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전쟁의 여파로 밀어닥치는 전염병과 가난, 붕괴된 가족 구조로 인해 버려지는 사람들 역시 큰 문제였다. 이런 문제들은 한국인 모두를 다만 생존을 위해 살아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예의와 체면, 충효 등의 건강하고 전통적인 가치관을 중시하는 한국의 유교적 전통문화는 전쟁으로 급속하게 무너졌다. 전쟁 후에 한국의 모습을 관찰한 미국인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는 ‘젊은이들이 노인들과 맞담배를 피우고 노인들의 의견에 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사회질서의 급격한 변동을 묘사했다. 이기주의와 물질주의가 한국사회에 만연하게 퍼져갔고 올리버는 “한국의 옛 보수주의는 마치 망치로 막 두들겨 부숴버린 꽃병인 양 자취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전통 가치의 붕괴, 생존 욕구의 극대화, 이기주의와 물질주의의 만연 등은 한국사회 전체에 엄청난 변동을 가져왔고 이는 종교도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의 하나가 한국기독교의 기복신앙 확산이었다.
 여기에 한국의 참상을 돕기 위한 해외 원조가 대규모로 시작되었을 때 가장 큰 규모로 활발하게 한국을 지원한 민간단체들은 대부분 외국 교회와 기독교 단체였다. 이 40여 개에 달하는 기독교 민간 구호단체들은 한국교회에 다량의 구호금품을 보내거나 직접 내한하여 활동하였고 한국인들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구호단체로 인식하였다. 물론 이는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지만 이 과정에서 물질적 도움을 받고자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가 급증하면서, 물질적 도움을 곧 하나님의 축복으로 설교하고 이해하는 경향이 심화한 것은 문제였다.
 1960년대에도 전쟁의 여파는 그대로 한국인의 삶을 옭아매고 있었다. 가난에 찌든, 그리고 그 가난을 어떻게든 벗어나기 위해 고향인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든 외로운 사람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이때 기복신앙은 완전히 한국교회의 중심 메시지가 되었다. 1980년대까지 부흥회, 기도원, 그리고 일반적인 예배에서 “위로와 격려, 축복의 약속과 헌신의 요구, 개인의 행복 추구, 신비체험 간증, 길흉화복의 예언”을 이야기하는 설교와 기도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교회는 급성장했다. 기독교인 수는 1950년의 60여만 명에서 1985년 650여만 명으로 약 11배 성장하였다. ‘역사상 유래없는 성장’이라는 한국교회의 소개 문구는 이 시기의 한국교회를 일컫는 것이다. 복음이 널리 전파되고 예수 믿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 기쁜 일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교회가 ‘예수 믿으면 부자 되고, 일이 잘 풀리며, 건강해지고, 자녀가 좋은 대학에 간다’는 그릇된 무속성 기복신앙이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된 것은 너무 큰 비용이었다. 이런 유행처럼 번져나간 기복신앙은 전국의 각지에 기도원 설립의 유행으로 이어졌고 교회의 통제와 지도를 거부하는 기도운동과 신앙사조가 번창하면서 수많은 이단 시비를 낳기도 했다. 이단으로 논란이 되었던 많은 신앙운동들이 근본적으로 무속성에 바탕하였고 기복주의를 매개로 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일들에서 파생하여 여러 형태의 가정 제단 운동, 기도모임 등의 그릇된 성령운동들이 교회를 혼란하게 하기도 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기도하고 간구하는 자들에게 은총 내리심을 부인하는 것은 바른 신앙이 아니다. 그럼에도 기복신앙을 문제 삼는 것은 물질적이며 현세적 성공을 은총의 표준으로 삼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뜻인 진실과 정의의 실천을 위해 노력하지 않거나 이기심의 충족만을 추구하여 교회와 신앙의 공공성을 외면하거나 인류사회의 공동선의 성취에 기여하지 않으면 이는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샤머니즘적 신비를 기독교 신비로 착각한 것처럼 세속적이며 이기적 번영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등식화시킨 것은 큰 오류였다. 이론상으로 그리 주장하지 않았지만 실제적 물질주의에 동화되고 있었으면 이는 진리의 영이신 성령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탐욕적인 바알의 길을 걷는 것과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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