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당하여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뿌리를 알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도 출신을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리마대 요셉은 아리마대 출신의 요셉을, 막달라 마리아는 막달라 마을의 마리아를, 구레네 시몬은 구레네 출신의 시몬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에게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마 21:25)라고 물으셨습니다. 그가 세속의 사람인가 하나님의 사람인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어디로부터 왔느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늘 자신이 하늘로부터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출신 지역으로 비하하고 직업으로 비하했지만 예수님은 당당하게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가르치고 행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고 하시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께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 받은 존재들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이 성전에서 주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사두개인들에 의해 잡혀 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들이 밤에 그들을 옥에서 이끌어내어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성전으로 가서 말씀을 전하던 사도들은 다시 잡혀 정식으로 공회의 재판을 받게 됩니다.
1. 죄 사함의 진리
사도들을 향한 논란의 핵심은 죄 사함에 관한 논리입니다. 우선 이 논쟁의 장소가 성전이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성전이었고 성전의 최고 기능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그리고 제사의 궁극의 목적은 죄를 사함 받는 일이었습니다. 구약에서부터 그들이 배우고 실천한 죄 사함의 길은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주장하는 죄 사함의 길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30-31절)고 했습니다. 과거에는 양과 소를 잡아 피 흘려 속죄제를 드리고 죄 사함을 받았지만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 사함의 은혜를 주시려고 예수님을 보내셨고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전제사의 시대가 끝났다는 것입니다. 죄 사함을 위한 다른 길이 제시되면서 제사도 필요 없고 제사장들은 할 일이 없어지고 성전은 그 중요성이 상실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사도들을 가두고 위협하고 저지하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이때 가말리엘이 나섭니다. ‘이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며 이 사상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여기 초라한 갈릴리 사람들도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들이면 어찌하려는가?’ 그의 설득은 이 상황의 중재를 위한 것이지만 그의 말에는 깊은 고민이 있어 보입니다. 예수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요 그의 가르침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면 역사는 뒤집어져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들이요 우리는 죄 사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죄 사함의 은혜를 증거하는 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2. 신앙과 양심을 따라
유대인의 지도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사도들을 위협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걷지 못하던 사람을 걷게 한 이후부터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던 사도들을 향한 일반 시민들의 인식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위기를 느낀 유대교 지도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불러 위협하면서 더 이상의 전도를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엄청난 압박과 명령 앞에서 신앙과 양심을 따라 보고 듣고 믿는 대로 진실을 말할 뿐 하나님 앞에서 신앙과 양심을 속일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공회에서의 재판에 대해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오히려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그 앞에서 물러났습니다.
성전제사의 무용론을 주장하며 이제는 새로운 죄 사함의 길이 열렸다는 사도들의 주장이 성전주의자들인 사두개인들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으나 바리새인들은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냉정함을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 중에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생각을 달리하면서 균열의 조짐을 보이게 되고 하나님께서는 이 온건주의자들을 사용하셔서 사도들을 도우십니다. 하나님께서 오직 십자가의 예수님만 구원의 주님이시며 우리는 이 예수를 전하지 않을 수 없다며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는 그들을 여러 방법으로 돕고 지키시며 역사를 이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이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고 그 때문에 박해와 고난을 당하여도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중단 없는 헌신
공회에서 채찍질 당하고 위협 받고 풀려난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는 그들의 명령에 전면 불복종하면서 생명의 복음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가장 표적이 되어 은둔해야 할 사람이 베드로인데 그는 오히려 사방으로 두루 다니면서 흩어진 성도들을 돌보는데 전력을 다하는 멈추지 않는 헌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교회 역사 가운데 사역의 중단이라는 요구와 위협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이 말씀은 당시 히브리인 성도들에게 각종의 유혹과 박해가 몰려올 때 어떤 상황 중에서도 모임과 전도와 선행을 중단하지 말자는 다짐과 각오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 10:37-39)고 했습니다. 견디기 힘든 어려움이 엄습해도 ‘조금만 더 견디면 주님 앞에 설 날이 다가온다. 여기서 물러서면 하나님 기뻐하지 않으신다.’라고 스스로를 다그치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모든 교회들은 멈추지 않는 신앙적 투쟁과 영적 순례를 이어왔고 그런 교회들에 의해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금년에는 좀 쉬자, 내년에는 잠시 멈추자.’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늘 이런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피곤하다, 힘 든다, 사정이 여의치 못하다.’ 등의 생각이 우리를 멸망으로 몰고 가려는 사탄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의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의 은혜를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신앙을 따라 처신하고 지속적으로 헌신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며 가야 할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