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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재건과 친일 청산의 실패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을 선언하면서 한국은 해방되었다. 해방을 맞이한 한국에서 교회에 다양한 책임이 주어졌다. 무너진 교회 조직과 신앙을 다시 세우는 일은 물론, 새롭게 출발하는 한국을 기독교의 바탕 위에 세우는 일 역시 한국의 근대화와 민족운동에 기여해 온 교회에 주어진 책임이었다. 그 중 시급한 것은 일제 말 통폐합된 교회 조직을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해방의 시점에 한국에 남은 유일한 교단은 일본기독교조선교단이었다. 이 교단의 지도자들은 조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싶어했다. 하나의 교회는 내한 선교사들이 초기부터 꿈꿔온 일이었다. 비록 강압에 의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기왕 하나의 교단으로 일치된 교회가 다시 쪼개지는 일은 아무래도 아쉬운 일이었다. 그리고 국가 재건의 전면에 나서고 있는 김구, 김규식, 이승만 등이 모두 기독교 신자인 상황에서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서는 통합된 교단으로 남아 최대한 세력을 크게 유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도 있었다.
 교단의 임원들은 교단 명칭을 조선기독교단으로 바꾸고 1945년 9월 8일 남한 교회들의 대회라는 뜻의 남부대회를 소집했다. 장로회와 감리회의 대표들이 참여한 이 대회는 시작하자마자 감리회의 대표들이 감리회를 재건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고 퇴장하여 정상적으로 진행될 수 없었다. 이에 11월 27일부터 30일 범교단적인 기독교조선남부대회가 다시 개최되었다. 일본기독교조선교단에 참여했던 친일인사들이 다시 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임시정부 지지, 선교사 내한 요청,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의 자주독립 진정 등을 결의하고 교단을 유지하기 위한 작업에 나섰다.
 그러나 이미 감리회가 교단의 재건을 선언하였을 뿐 아니라 장로회에서도 다시 원래의 장로회 조직으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힘을 얻어 1945년 11월에 경남노회, 12월에 전북노회가 재건되었다. 해방 직후 북한 지역에서 내려온 교계 지도자들도 남쪽 교회만의 통합 움직임을 반대하고 나섰다. 남부대회는 점점 친일 인사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모임이라는 비판에 휩싸였다. 결국 1946년 4월 30일에서 5월 2일에 열린 제2차 남부대회가 ‘각 교파는 각자 성격대로 활동키로’ 결의하자 통합을 유지하려던 시도는 좌절되었다.
 교회 재건 움직임은 남부대회가 유지되던 동안에도 빠르게 진행되었다. 감리회는 1945년 12월 감리교회유지위원회(재건파)를 조기하고 친일 교계지도자들이 주도했던 1939년 이후의 감리회의 역사를 부정하고 감리회 재건에 나섰다. 반면 친일 인사들은 1946년 9월 특별총회를 열고 재건파와 대립하는 복흥파를 조직하였다. 초기에는 교권을 유지하고 있던 복흥파가 우세를 보였지만 월남 교역자가 늘어나고 선교사들이 재입국하면서 점점 재건파가 힘을 얻어갔다.
 장로회도 1946년 초에 남한 지역의 노회 재건을 완료하고 5월 남부총회를 개최했다. 1947년에 열린 제2차 남부총회는 제33회 총회로 규정되었다. 이는 1946년의 남부총회를 제32회 총회로 셈한 것으로 1942년 제31회 총회 이후 조직된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1943년 조직)의 역사를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
 교단의 재건이 일단락되자 자연스럽게 친일 청산이 교회의 과제로 떠올랐다. 1948년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도 제헌국회에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설치하였다. 반민특위에는 여러 명의 교계 지도자들이 회부되었다. 장로회에서는 적극적인 친일 행각으로 ‘조선판 가룟유다’라는 별칭이 붙은 정인과를 비롯하여 전필순, 김길창 등의 목사가, 감리회에서는 감독을 지낸 정춘수, 양주삼 등이 구속되었다. 그러나 친일 인사들을 처벌하는데 소극적이었던 이승만의 정책으로 반민특위가 해체되자 모두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기소된 교계 지도자들이 법의 심판을 벗어났다고 하여 그들에 대한 비판이 잠잠해진 것은 아니었다. 감리회에서는 재건파가 복흥파에 대한 공격을 이어갔다. 감리회 친일의 상징과도 같았던 정춘수 목사는 자신에 대한 교계의 공격이 심해지자 진짜 구원은 천주교에 있다고 선언하고 천주교로 아예 개종해 버렸다. 장로회에서는 신사참배 거부운동으로 투옥되었다가 해방을 맞아 석방된 이른바 출옥성도들이 친일 교계지도자에 대해 날선 비판을 제기했다. 우상숭배인 신사참배를 주도한 교계 지도자들의 자숙과 회개를 통해 교회를 정화하고 재건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출옥성도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장로교회의 분열로 이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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