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건국론
1945년 한국은 외세의 힘에 의존해 해방되었다. 준비되지 않은 해방은 분단으로 이어졌다. 두 강대국, 소련과 미국의 진주로 한반도는 냉전체제의 상징적인 공간이 되어야 했다. 한국인들은 소련과 미국의 신탁통치를 찬성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어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대체로 기독교 계열은 신탁통치를 반대하였고 사회주의 계열은 신탁통치를 찬성하였다.
임시정부의 주역이었던 기독교 민족지도자들은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국가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당시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던 지도자들은 모두 새로운 대한민국은 기독교 정신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보았다. 김구는 ‘경찰서 열보다 예배당 하나 세우는 것이 낫다’며 새로운 나라를 ‘성서 위에 세우고 우리는 하나님의 국민이 되어 서로 잘 살자’라고 말했다. 김규식은 ‘우리나라 건설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할 수 있을 것이기에 인간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자’고 말하며 기독교의 바탕 위에 새로운 나라를 만들자고 주장했다. 이승만 역시 “만세반석 되시는 그리스도 위에 이 나라를 세우자”라고 연설하였다. 이들은 진정한 강국은 종교로 교화된 도덕적이고 문화적인 나라이며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라 생각했다.
당연히 한국교회도 기독교의 신앙 위에 세워지는 나라를 꿈꾸었다. 초기부터 한국교회에는 신앙과 애국이 분리되지 않는 전통이 있었기에 교회가 건국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적 건국이념을 제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기독교 건국론을 설파한 대표적인 인사는 김재준과 한경직으로 이들은 탁월한 외교적?정치적 감각을 갖춘 미국?캐나다 유학파로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반공주의 성향의 목회자였다.
김재준은 해방된 한국에서 유능한 젊은이들이 사회주의에 빠지고 있는 것은 교회가 지도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기 위해 기독교 건국론을 주장했다. 김재준은 정치와 종교는 분리되어야 하지만 교회는 창조적인 인물을 길러내어 정치를 비롯한 다양한 영역에 인재를 공급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인정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국가의 정치제도는 반드시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것이어야 하며 참된 민주주의야말로 참된 기독교적 정치제도라고 확신했다.
한경직은 새 나라의 정신적 기초는 반드시 기독교가 되어야 하며 또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민주주의의 사상적 근본은 성서이며, 인격의 존중, 개인의 자유, 만인의 평등이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한경직에게 이 인간 존중과 자유, 평등은 민주주의의 이념이자 곧 기독교의 정신이었다. 한경직은 교회가 국가의 초석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민주주의는 국민의 각성과 도덕적 향상이 없으면 불가능한데 이런 국민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한경직이 생각하는 최고의 정치운동은 곧 복음전도였다. 그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을 신뢰하였다.
두 사람의 사상적 차이는 1970년대에 이르러 김재준이 민주화운동에 투신하여 자유와 인권을 부르짖고 있을 때 왜 한경직은 민족복음화운동을 주도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두 사람은 생각과 방식은 서로 달랐지만 한국을 기독교 위에 세워진 더 나은 민주국가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은 같았고 이를 평생 놓지 않았다.
어찌되었든 해방 당시 한국교회가 최종 파트너로 선택한 정치인은 이승만이었다.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는 강한 기독교 박해가 있었고 많은 기독교인이 박해를 피해 월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민족 통일을 우선시하며 북한과의 대화를 추진하고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 김구, 김규식, 여운형보다는 미국과 손을 잡고 단독정부 수립에 적극적인 이승만이 친미반공적인 교계의 분위기와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들은 이승만을 지지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했다. 국회의원과 정부 고위 관료로 진출하는 이들도 상당히 많았다. 한 연구에 따르면 제헌국회 전체 의원 209명 중 약 24%에 해당하는 50명이 기독교인이었다. 당시 기독교 인구 비율은 0.5-2%에 불과했던 것에 비하면 기독교의 과대표성이 드러난다. 김흥수 목원대 명예교수는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은 정부나 국회, 나라 전체에서 뚜렷이 감지되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기독교로의 대규모 개종과 한국 사회의 급격한 기독교적 변용에서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이승만의 건국 비전이 실현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면서 기독교 건국론이 일정 부분 현실로 이어졌음을 설명했다.
그러나 한반도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자는 기독교 건국론은 이승만 정부와 한국교회의 유착으로 인해 그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다. 정부는 노골적으로 친기독교 종교정책을 추진하면서 한국교회에 큰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제공했고 교회는 그런 이승만 정부의 절대적인 지지세력이자 선거운동 기구로 전락하여 독재에 부역한 것이라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이승만 정권기 내내 기독교의 교세는 성장하고 사회적 영향력은 커졌지만 공공성과 공신력은 계속 약화되었다. 결국 이승만 정부의 종식을 알리는 4.19혁명이 발생하자 대중은 기독교를 정부와 함께 청산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기독교의 정신이 구현되는 국가를 만들자는 기독교 건국론이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의 야합으로 변질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런 해방기의 역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나라는 기독교인들이 지배 계층을 독점하고 기독교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나라가 아니라 한경직이 꿈꾸었던 것처럼 인간의 존엄, 자유와 평등 같은 기독교적 가치가 보장되는 나라임을 교훈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