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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의 분열
 현재 한국장로교회는 수많은 교파로 분열되어 있다.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단을 포함하여 약 374개의 기독교 교파가 있고 그 중 ‘대한예수교장로회’를 사용하는 교단은 287개에 이른다. 물론 이 중에 대다수는 군소 교단이고 일부 이단이나 사이비 종파가 포함되어 유동적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럼에도 200개가 넘는 대한예수교장로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한국 장로교의 분열이 매우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교파도 상황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간혹 외국인 신학자가 왜 한국에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나뉘어져 있는가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예수교성결교회, 기독교성결교회, 기독교감리회, 예수교감리회로 분열되어 있는 것이 퍽 이상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까지 한국 장로교회는 하나의 교단을 유지해 왔다. 그러다 1950년대에 세 번의 큰 분열을 경험하면서 한국 장로교회의 핵분열이 시작되었다. 1952년의 고신분열, 1957년의 기장분열, 1959년의 통합-합동분열이 이 모든 분열의 출발점이었다. 이 분열의 씨앗은 선교 초기의 선교지분할협정에서 찾을 수 있다. 각 지역별로 각 선교부들이 나누어 선교를 맡는 것은 당시로서는 선교부들 사이의 연대와 협력의 결과물이었지만 각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신학적 신앙적 분위기가 고착되었던 것이다. 장로회 중에 가장 보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던 호주장로회가 경남 지역을 선교하였고 상대적으로 가장 진보적인 캐나다장로회가 함경도 지역을 선교하였기 때문에 예장 고신이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졌고, 기장이 함경도 출신 인사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 그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각각의 분열은 서로 다른 명분으로 진행되었다. 가장 먼저 고신 분열은 일제 말의 신사참배 여부와 관련이 있었다. 호주장로회의 선교지역이었던 경남 지역은 보수적인 신앙인이 많았으므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투옥된 인사들이 많았다. 이들은 해방 후 신사참배한 이들의 자숙을 요구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친일인사들은 개인적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 간 사람보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오명을 무릅쓴 자신들의 노고가 더 크다고 항변했다. 적극적 친일인사인 김길창 목사는 경남노회에서 전혀 반성하지 않는 무례한 태도를 보이며 과거에 자신이 주도했던 친일행적을 처음 듣는 이야기인 양 행동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고려신학파 분열, 이른바 고신 분열이 발생했다.
 기장 분열은 신학사조가 문제였다. 장로교회는 전반적으로 보수적인 정통주의 신학을 유지해왔다. 그러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평양신학교가 폐교되고 서울에 조선신학교가 개교하였는데 이때 조선신학교를 운영했던 이들은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인 인사가 김재준과 한경직이었다. 한국의 보수적인 신학분위기에서는 성서해석에 다양한 인문과학적 방법론을 채택한 신정통주의도 자유주의 신학으로 오해되고 있었고 이로 인해 교단 내에 분쟁이 발생하였다. 결국 박형룡 박사를 중심으로 한 교단의 보수적인 지도층은 조선신학교 출신 인사들의 목회자 안수를 금지하였고 이로 인해 김재준을 위시한 조선신학교 인사들이 새로운 교단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설립하고 분열하였다.
 마지막 통합-합동 분열은 용공시비가 큰 문제였다. 당시 장로회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WCC)에 가입되어 있었다. WCC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다양한 국가의 교회들이 회원으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사회주의 국가인 동유럽의 교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장로회 내에는 용공의 혐의가 있는 WCC를 탈퇴해야 한다는 의견과 그럴 경우 세계 기독교계에서 고립될 것을 염려하며 회원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수의 대표격인 박형룡 박사가 대구에서 신학교 총장을 수행하던 도중 학교와 상의 없이 학교자금 3천만 환을 한 로비스트에게 학교의 수도권 이전을 위한 로비자금으로 제공했다가 사기를 당한 일이 발각되었다. 당연히 교계의 큰 문제가 되었고 박형룡 박사의 실각이 예상되었다. 그때 보수권 인사들은 WCC의 용공론을 맹렬하게 주장하면서 박형룡 박사의 퇴진은 보수신학의 퇴진을 의미한다며 박형룡 박사가 신학교 총장을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사건이 비화되어 한경직을 중심으로 한 WCC 잔류파(통합)와 박형룡을 중심으로 한 WCC 탈퇴파(합동)는 각각의 총회를 열면서 분열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WCC가 6.25전쟁을 세계에서 가장 먼저 북한의 남침으로 규정하고 북한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국제기구였던 사실은 간과되었다.
 각각의 분열에는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그러나 그 명분은 과연 진실한 것이었는지 물을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통합 측은 교회의 분열을 감수할 정도로 WCC의 회원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WCC 탈퇴를 결의하였지만 양측은 다시 하나로 합쳐지지 않았다. 만약 정말 WCC의 회원권이 분열의 실질적인 원인이었다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를 분열시켜서라도 자기 세력이 지배해야 한다는 욕망이 더 큰 근본적인 문제였다.
 이후 고신과 기장, 통합이 더 이상 이렇다 할 분열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합동은 상황이 많이 달랐다. 세계교회와의 연대가 끊어진 합동 측은 더 이상 미국의 선교자금을 제공받지 못하게 되어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했다. 그리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정치적 극우, 종교적 근본주의 성향을 가진 국제기독교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 ICCC)와 손을 잡았다. 그리고 다시 ICCC의 영향력을 둘러싼 내홍에 휩싸여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였다. 결국 교단의 분열사는 신앙도 신학도 이념도 근본 원인이 아니었다. 오직 인간의 욕망만이 교회를 분열시킨 근본 원인이었다. 그리고 이 분열은 한국 사회에서 한국 장로교회 위상을 추락시켰다. 교회는 일치할 때 가장 당당하고 가장 능력이 있다는 고대 교회 교부들의 가르침을 다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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