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윤 원로목사
(종교개혁500주년기념사업회 대표회장,
한국기독교학술원장)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3가지 영역에서 개혁의 필요를 주장했다. 마틴 루터는 교리개혁, 예배개혁 그리고 생활이 근본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한 칼빈은 교리, 치리(discipline), 그리고 성례(sacraments)에 다 경건한 직분자들에 의한 예배(ceremonies)를 개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구원교리, 순수한 성례전이 있는 예배 그리고 교회의 생활개혁을 기독교 개혁의 핵심 과제로 삼았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모든 것을 그가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요4:25)한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와 만나 한 말을 W. Robert Godfrey는 인용하면서 이때 예수는 생수, 남편문제, 예배에 관한 말씀을 하셨다고 지적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이해한 신자는 교리, 예배, 생활이 항상 긴밀하게 엉켜있고, 서로 연결되어 있다. 믿음은 하나님의 진리(교리)를, 하나님과 만남(예배)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생활)을 의미한다. 이 세 요소의 불가분리적 관계는 종종 성경에서 보여줬고 하나님 백성들의 역사에서 찾아졌다.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은 발전하고 앞으로 나가고 있지만 종교개혁은 하나님 말씀인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그래서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로 돌아가는 종교개혁운동을 일으켰다.
Ⅰ. 현대의 예배가 흔들리고 있다.
현대문화는 민주화되고, 개인주의적이고, 반지성적인 Post-modernism 시대와, 실용주의와 낙천주의에 물들어 있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마저도 하나님을 떠난 인본주의적 예배로 변질되고 있다.
시대가 변하면 새로운 것이 와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특히 설교와 음악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요한 칼빈은 교회 건물에서 십자가를 포함하여 모든 종교적 형상이나 상징물을 제거함으로 깨끗케 했다. 그는 회중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성경을 읽고 설교하는 것을 예배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는 성경이 보증하지 않는 의식들과 행사를 없앴다. 그는 악기들을 제거하고 회중이 하나님의 말씀인 시편을 노래하게 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 복음 그리고 심오한 감각을 가지고서 하나님과 갖는 만남을 예배의 중심으로 회복시켰다.
하나님의 영적인 성격은 예배에 있어서 그리고 우상숭배를 피하는 모든 노력에 있어서 기초가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Institute)에서 결코 가시적 형태로 하나님이 묘사되어서는 안된다(I. 11. 1) 했다.
그는 갈라디아서4:8을 인용하면서 예배(latria)는 하나님께만 드려지고, 숭배(dulia)는 형상들이나 성인들에게 드려지는 것이라 한 중세신학자들이 만든 구별을 논박했다. 타락한 인간들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형상들로 묘사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위태롭게 하려 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케 된다.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사람의 본성적 성격이 소위 끊임없는 우상의 공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는 하나님의 보증없이 교회가 고안한 예배에 성도들의 양심을 묶을 권세가 없다고 칼빈은 강조했다.
성경의 하나님은 예배를 창조적으로 만들거나 혁신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이 지시한대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자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레10:1, 2)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예배는 그 방법까지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는 진실해야 한다. 그러나 진실 자체만으로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 엘리야때 바알의 제사장들은 진실했다. 사마리아에서 여호와께 예배한 이들도 진실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1,2계명을 범한 예배였기 때문에 거절하셨다. 인간의 신실함이 거짓된 예배를 정당화 하지 못한다. 단순하고 영적인 예배는 훈련되고 일관성 있는 크리스찬의 삶을 격려할 것이다. 크리스찬 예배는 인간 삶속에서 The most momentous(가장 중요한 것), The most urgent(가장 긴급한 것), The most glorious(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 정의했다고 James Boice는 그의 요한복음 강해(1권 48, p.363)에서 칼 바르트(K.Barth)를 인용했다. 이같은 예배는 성경으로 돌아가 교리와 생활에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게 한다.
Ⅱ. 사라져 가고 있는 강해설교
지금으로부터 500년전 우리의 신앙의 전기를 마련해 준 종교개혁자들에게 감사와 찬하를 드리면서 나는 오늘의 교회의 강단(pulpit)을 특별히 생각해 보기로 한다.
1) 강해설교가 현대인의 강단에서 점차 사라지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신뢰감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권위와 충분성에 대한 신뢰가 침식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다. 19세기초 자유주의신학은 성경에 기록된 기적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할 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역사성을 거부하는 역사비평주의로 성경의 권위에 도전해 왔다. 그리스도의 비신화화(Demythologized Christ)같은 신학이 성경을 거부하고 신뢰감을 상실케 했다. 그 결과 성경 주석의 불필요성이 교회 안팎에서 팽배해 갔다. 복음주의 교회에서 성경을 읽고 있으나 그것이 부적절하다는 생각에 빠진 설교자는 강해설교를 기피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비성경적 예언자적 말씀으로 강단을 채우고 있다. 심리적 강연이 성경강해보다 회중을 즐겁게 한다는 사실을 터득한 설교자는 성경은 맛보기로 읽은 후 심리치료에 전념한다. 이런 교회에 강해설교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강해설교가 사라지는 또 하나의 이유는 현대인의 관심의 중심은 경제, 정치, 행복 등에 있지 신학적, 영적인 문제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설교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을 설교했다. 그러나 현대인의 강단은 하나님보다 회중을 더 중요시한다. 오늘날 역할모델(Role models)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강해설교가 사라지는 이유가 된다.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매우 희귀한 것도 사실이다. 좁은 길보다 넓은 길 가기를 좋아하는 젊은 설교자는 난해한 강해설교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때에, 쉬운 길로 가도 설교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성경본문의 섬에서 현대문화의 섬에 쏜 화살이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지듯 성경신학과 현대문화의 두 지평을 함께 할 수 없으니 난해한 강해설교보다 현대문화의 옷을 입힌 설교가 효과적이라 생각한다.
또한 강해설교는 생명이 없고 지루하고 커뮤니케이션에도 어려움이 있으므로 많은 설교자들이 스스로 피하고 있다. 그러나 강해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목소리다. 설교자는 그 입이고 입술이다. 회중은 그 음성을 듣는 귀다.
강해 설교가 사라짐으로 그 결과는 참담하다. 교회내에 혼란이 온다.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보낸 서신에서 “불순종하고 헛된 말을 하여 속이는 자가 많다”고 하면서 “그들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득을 취하려고 마땅하지 않은 것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는도다”(디도서1:10, 11) 여기서 바울은 장로들의 책임을 제시한 것이다. 성경의 철저한 지식으로 거슬러 말하는 자를 치리할 것을 보여준다.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의 책임은 그 당시 교회의 장로들의 무지에 있다”고 미국의 Westminster신학교의 Paul Woolly교수의 강의를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권면한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5). 강해설교가 사라지면 교인들이 영양실조에 걸린다. 히브리서5:12-13은 우리에게 이 점을 시사하고 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히5:12-13) 이같은 환자에게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성숙에로 이르게 하실 준비된 말씀을 설교와 가르침을 통해 먹이는 길 외엔 없다.
2) 강해설교가 오늘의 시대에 회복되거나 신실하게 시행되어야 할 이유를 우리는 찾아야 한다.
⑴ 강해설교는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시편 기자는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시138:2)고 선언한다.
강해설교는 성경 본문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과 함께 출발하고, 그 안에 예배가 있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활동을 선포한다. 예배자의 중심과 초점은 하나님께 있고, 인간의 어떤 관심과 필요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다. 여기서 우리는 설교가 청중의 관심에 집중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 초점을 맞추어야 함을 확인할 수 있다.
⑵ 강해설교는 설교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 연구를 깊이 있게 하게 한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의 생도가 되게 한다. 성경을 깊이 연구할 뿐 아니라 본문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위한 기도가 필수적이다. 설교자가 청중보다 먼저 하나님 말씀으로 충격을 받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⑶ 강해설교는 회중을 돕는다.
강해설교는 회중에게 성경을 배우게 하고 매우 자연스런 방법으로 하나님 말씀을 자기 삶에 적용케 한다. 따라서 설교자가 회중의 성경해석을 도울 수도 있지만 잘못 인도할 수 있는 위험성도 있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자는 하나님과 회중 앞에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강해설교를 준비해야 한다.
⑷ 강해설교는 성경 전체를 취급할 것을 요구 받는다.
강해설교자는 성경의 난해구절이나 자기가 좋아하는 구절 속에서 사는 것으로부터 피할 수 없다. 논쟁적인 동성연애나 자살문제 또는 종말론 그리고 이스라엘의 구원같은 이슈를 다룰 때 성경에서 언급된 것들을 모두 취급해야 한다.
⑸ 강해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균형잡아 제공한다.
구약과 신약의 균형, 예언과 완성, 구원과 심판을 균형있게 설교해야 한다.
어느 목사가 디모데서를 시리즈로 설교했다. 어느 주일 3장 1-13절을 읽었다. 그 목사는 그날 설교 초두에 ‘처음 일곱 절은 오늘 그냥 지나가고 8절로 들어가 말씀을 전하겠다’ 했다. ‘우리교회는 침례교회이기 때문에 감독이나 장로가 없기 때문에 집사에게 주는 말씀만 갖고 증거하겠다’고 한 것이다. 강해설교는 성경 본문의 우선권과 충분성을 주장한 다.
⑹ 토요일밤의 고민을 없게 한다.
많은 설교자들은 토요일 마지막 시간까지 설교 준비에 전전긍긍한다. 솔직히 나는 토요일엔 비서출근도 금하고 홀로 하나님 면전에 엎드려 준비된 설교를 갖고 기도시간을 주로 갖는다. 설교의 충분한 outline을 만들고 설교시간에 자유의 영을 달라고 준비하고 기도한다.
3) 현대인의 설교자 풍자
오늘날 강단 위에서 하나님 말씀을 선포해야 하는 설교자가 무대 위에 서 있는 또는 대중 앞에 서 있는 리더 아닌 리더처럼 풍자된다.
⑴ 응원단장-주일에 많이 모인 회중 앞에 서서 자기만족에 도취되어 청중을 웃기고 끌고 가는 응원단장으로 풍자된다. 설교자의 책무는 회중을 격앙시키고 고무시키는 정도로 생각을 한 것 같다. 슬프게도 회중은 생명의 양식을 먹지 못한 채 허약해서 흩어지고 milk-shake설교로 단맛만 빨다간 어린아이들처럼 영혼은 굶주린 상태로 방치된다. 이런 설교자 때문에 교회엔 이단과 사이비가 자라나는 배양소로 변하고 있다.
⑵ 마술사-설교자의 설교를 듣고 회중은 감탄과 환호성을 치는 경우가 있다. 그가 전한 메시지는 복음이다. 상황속에서 본문의 실제적 의미를 캐내는 난해한 작업을 거부한 설교자는 기가 막힌 체면술로 청중을 홀린다.
⑶ 이야기꾼- 청중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한다는 심리를 이용해 설교자는 성경을 이야기식으로 풀어 설명한다. 성경강해의 어려운 작업을 피해 쉽게 일을 감당하려 한다. 물론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러나 그것은 하늘나라의 의미를 세상적 이야기로 비유해서 주신 말씀이다.
⑷ 예능인-강단 위의 설교자로 하여금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세워놓은 예능인 정도로 풍자하는 경우도 있다. 진지하게 부른 찬송과는 달리 예능인의 연기를 설교자에게서 보고 싶어한다.
⑸ 체계를 세우는 자-설교자는 교리강좌의 배경막처럼 설교가 교리설명으로 채우게 된다. 그에겐 본문을 통한 감성적 감화같은 것은 고려되지 않는다. 그 설교 후 신학적 교리는 알게 되나 결심이 생기거나 열정이 생기지 못한다.
⑹ 심리학자- 비행기내에 비치된 잡지를 읽으면서 가벼운 상식을 얻을 수 있으나 곧 잊어버리거나 잊어버려야 하듯 현대 설교자를 통해 사이비 심리학자의 처방을 받은 회중은 그것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일에 도움보다는 쉽게 잊어버릴 까십과 같은 수준이다. “에스라에게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책을 가져오라”하듯 오늘도 회중은 하나님 말씀 듣기를 기다리고 있다.
⑺ 벌거벗은 설교자- 설교자가 강단에서 자신의 허물과 약점 심지어 자신의 진실성을 보여 주려는 허망한 표현들을 쏟아놓는 경우도 있다.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가 이런 모습으로 풍자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도 않고 하나님께 불경죄를 짓는 것이다.
Ⅲ. 강해설교(Expository Preaching)란 무엇인가?
느헤미야 8장을 언급하지 않고 강해설교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레위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한 것을 다 깨닫게 하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수문 앞 광장에 모인 회중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하나님의 말씀듣기를 기대하면서 열정과 간절함으로 설교자 에스라에게 청했다. 이와 같은 높은 기대감은 성경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성경의 말씀 듣기를 기대하면서 모인 회중과 그렇지 못한 회중 사이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칼빈은 그의 에베소서 주석에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가 교회에 오는 것은 죽어야 할 인간의 말을 듣기 위함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의 비밀스런 권능으로 우리 영혼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기 위해 오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인간의 음성으로 우리 속에 들어오시어 그 말씀으로 우리를 기운나게 하고 양육시키시는 스승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입을 벌리시면서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인격으로 계신 하나님을 보았다.”
그렇다면 강해설교의 핵심원리는 무엇인가?
⑴ 성경본문과 함께 시작한다.
강해설교는 성경본문과 함께 항상 시작한다. 이 성경 본문은 최근의 사건 또는 현대인의 음악가사와 달라, 설교의 내용이 되므로 상황(context)을 고려한 본문을 갖고, 성경전체를 통해 메시지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자는 성경 전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필수적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위대한 idea나 해설가가 아니라 그 시대와 상황에 맞는 본문을 찾아 성경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고 성경을 설교한다. 우리 주님이 강해설교의 알파와 오메가시다. 성경에서 시작해서 성경으로 끝나고 성경에서 모든 것이 나온다. 그러므로 강해설교는 성경중심의 설교(Bible-centered preaching)다. John Stott는 “참된 신자의 설교는 강해설교여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신념이다”라 한다. 강해설교는 주제설교 (topical), 경건설교(devotional), 전도설교(evangelistic), 본문설교(textual), 변증설교 (apologetic), 선지자적 설교(prophetic)같은 설교style 중 하나로 생각 하는 것은 큰 오해다.
강해설교는 성경이 어떻게(how)말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what) 말하느냐를 찾는다. (Preacher decides what to say, not how to say it.) 강해설교는 본문을 단순히 주석하는 것이 아니다. 상호 연결없이 단어와 단어, 절과 절을 주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철저한 주석과 논리적 순서의 배경없이 구절에 관해 어물쩍 넘어가는 주해가 아니다. 주제와 전체개요 그리고 계시의 점진성(Progressive Revelation)이 결여된 순수한 주해가 아니다. 가령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할시 구약과 신약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조직화시킨 교리적 설교와 달리 사랑이라는 단어를 계시의 점진성을 이해한 강해 설교자는 그 해석이 전혀 다르다. 구약에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하셨지만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하셨다. 전자는 사랑의 표준이 자기 자신이지만, 후자는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러므로 강해 설교자는 성경을 점진적 계시의 입장에서 주석한다. 강해설교는 문장의 한부분만을 사용하는 주제 설교가 아니다. 성경이 오늘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찾아 적용(application)시킨다. 진정한 강해설교는 교리적 설교(Doctrinal preaching)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특정한 진리를 선포한다. 강해 설교자는 자기 연구 내용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자가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권위있게 전달해 주는 대사요 메신저라 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16장 19-31절에서 부자와 거지가 죽어 음부와 천국에 각각 가서 고통 중에 있던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에게 청하여 이르되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시원하게 해 달라고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며 간청한다. 아브라함은 너와 우리 사이에 건널 수 없는 큰 구렁텅이가 있어 오고 갈 수 없다 하며 거절하였다. 그는 다시 그러면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 집에 보내어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해 달라 요청한다. 아브라함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가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여기서 모세는 율법을, 선지자는 히브리어 nabi로 대언자를 가리킨다. “모세는 아론에게 말하고 아론은 그 입을 대신할 것이다.”(출4:15, 16; 헬라어 προΦήτης는 미래를 하나님 뜻대로 예언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외치는 자다. crier, proclaimer) 신약의 사도 또는 대사라는 άπόστολος는 보내심을 받은 자(요13:16)다.
사도 역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자다. 이 시대의 설교자도 자기 생각과 경험과 지식을 말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다.
⑵ 두 세계 사이에 서라.(Stand Between Two Worlds)
강해설교의 정신은 두 개의 성경본문에서 예시된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한 것을 다 깨닫게 하니”(느8:8)와 “이는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여러분에게 전하였다."(행20:27) 한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도 눅4:16-22에 의하면 회당에서 이사야61:1,2절 말씀을 강해하셨고, 후엔 엠마오 도상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주제로 해석해 주셨다.(눅24:27, 32, 44-47) 사도행전8:27-35에서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이사야 53:7-8을 강해했고,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역사적, 전기적 강해설교를 했다.(행7장)
이와같은 강해설교는 성경 본문과 현실세계의 두 지평의 융합(to fuse)을 찾는다.
성경본문을 설교자의 경험 속에서 재번역(retranslate)해야 하는 과제가 강해 설교자에게 주어진다. 시대 상황에 따라 관심과 잇슈와 문화의 스텍트럼(spectrum)이 다르다. 설교자는 성경의 세계와 청중이 살고 있는 세계 사이를 연결시켜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선포하기 위해, 그 의미와 함의를 찾아야 그 말씀을 적절하게(relevance)선포할 수 있다.
⑶ 적합성을 보여라(Show Relevance)
강해설교는 1세기때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보낸 서신이 21세기에 서울에 살고 있는 회중에게 왜 적절한 말씀인지를 설명하여 청중을 격려한다.
강해 설교자는 두 개의 다른 세계를 조화롭게 연결시킴으로 청중이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기들의 경험 속에 성경을 어떻게 통합(integrate)하는지를 배우게 한다. 청중이 듣고 있는 말씀이 현실세계에 살고 있는 자신들과 완전히 무관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을 위한 것(just for them)임을 확인시켜 주고, 즉각적으로 적용케 해야 한다. 이때 메시지가 부적합한 경우와 또는 즉시 적합한 경우가 있다.
설교자는 본문을 잘 주석하고 그 의미를 청중에게 잘 이해시킨다. 그러나 이때 중요한 것 은 청중의 개인세계에 적합한 메시지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가령, 성육신에 관한 말씀을 전할 때 청중은 설교자가 성육신적 목회자인지를 생각케 된다. 따라서 신행일치(信行一致) 의 삶이 결여된 설교자는 강해 설교자가 될 수 없다.
반면에 청중이 즉시 적용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나’ 성경 본문을 이해한 것에서부터 자기 개인의 삶에 즉각적으로 적용한다. 그러나 이때에 청중이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가 문제다. 따라서 강해 설교자는 성경을 깊이 그리고 신실하게 연구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정확하게 전파해야 한다.
Westminster Dictionary for Public Worship을 위한 세 가지 원리를 기억하라.
① The matter we preach should be true, that is, in the light of general doctrines of scripture.(성경의 일반교리의 빛에 비추어 볼 때 진리를 설교해야 한다.)
② It should be the truth contained in the text or passage we are expounding.
(설교자가 강해한 본문 속에 진리가 내포 되어야 한다.)
③ It should be the truth preached under the control of the rest of scripture.
(설교된 진리는 성경의 다른 부분의 제약 아래 있어야 한다.)
Ⅳ. 강해설교의 실제
설교자는 그들의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이 설교자에 따라 다양하다. 어떤 이는 독특한 기억력을 갖고 준비하고 전달한다. 어떤 이는 테크놀로지를 능숙하게 사용한다. 대부분의 설교자는 텍스트를 준비한다. 이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의존하면서 말씀을 선포한다.
⑴ 빈마음으로 묵상하라.
묵상은 기도와 다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하신 일과 하고 계신 일을 생각하는 것을 묵상이라 한다. 다른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묵상한다.
⑵ 충분히 읽어라.
목사는 폭넓게 그리고 규칙적으로 유익한 책들을 독서하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된다. 특히 설교자는 성경을 꾸준히 읽어야 한다. 읽는 중에 가슴에 부딪히는 구절을 표시하고 혼자 주석도 하고 관련 주석책들을 찾아 연구하라.
⑶ 분명하게 기록해라.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면서 성경을 읽다가 본문을 선택하라. 강해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설교의 목표설정, 구조조직, 본문주석, 내용채움, 서론준비)을 거쳐 설교를 기록하라.
⑷ 뜨겁게 기도로 익혀라.
강단이 어름처럼 차가운데 회중이 불이 붙을 이유가 없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설교자의 개인 기도와 간절함이 없이 강단은 차가울 수 밖에 없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니라”(행6:4)한 것처럼 오늘의 설교자도 말씀을 기도와 분리시킬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⑸ 자신이 설교한다는 것은 잊고 설교하라.
어떤 이의 설교를 닮으려 말라.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시고 싶어 하신다. 그러므로 당신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말고, 그러나 당신 자신임을 잊어버려라. 내가 설교하고 있다는 것은 잊어야 주님께서 나를 통해 말씀하신다. 설교자는 연약하게, 당당하지 않게, 사려없게, 가볍게 행동하는 자처럼 보이나 그에 의해 하나님의 말씀이 운반될 때 청중은 놀라운 감동과 변화를 받게 만드는 것이 강해설교의 열매다.
Ⅴ. 강해 설교자의 과업
복음의 신비를 깨달은 지혜와 이해를 한 강해 설교자의 과업은 무엇인가?
우리가 선포한 진리의 권능을 스스로 체험해야 한다. 그러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알아야 하고, 맡겨진 양들을 먹이기 위해 그들 중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면서 양들의 환경과 여건을 분별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히 있어야 하고, 인간 영혼을 사랑하고 동정하는 뜨거움이 있어야 한다.
강해설교자는 두 가지 확신을 갖고 출발한다. 성경 본문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인 것과 성경의 모든 구절이 모든 사람에게 이해되도록 주어진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따라서 설교자는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그리고 현대인이 예민하게 받아 드릴 수 있도록 강해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즉 본문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며, 그 본문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찾아내야 한다. 두 가지 확신과 두 가지 의무를 시행한 후 그 결과를 기대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다는 기대감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말씀에 순종을 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야 할 것을 말하면서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6b)라고 반문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와 하나님의 권능 안에서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