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광복 76주년이 되는 광복절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이 나라에는 수많은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와 일본 강점기의 탄압에 앞장서서 저항하는 순교자가 있었다. 그 가운데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광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 순교한 양용근 목사가 있다.
매산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예수를 믿게 된 양용근은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만 끔찍한 사건을 접하게 되었다. 1923년 일본은 동경과 요코하마에 걸쳐 대지진이 일어났다. 이 큰 지진(관동대지진)으로 사회적 불안감이 고조되자 일본 위정자들은 이것은 한국인들의 대폭동으로 인한 방화사건으로 위장하기 위하여 당시 일본에 있는 6천여 명의 재일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양용근은 하나님께 남은 생을 바치기로 하고 일생을 목회에 투신하였다.
귀국한 그는 가산을 있는 대로 정리하여 고향 마을에 배울 수도 없고 배우지 못한 가난과 불운에 빠져 있는 후진을 양성하기 위하여 『오사학원』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한국사와 성경을 가르쳤다. 그 후 1939년 목사안수를 받고 목회를 하며 병들고 소외된 불쌍한 자들을 위하여 애양원교회에서 성역을 감당하였다.
일본은 강점기 말에 접어들면서 더욱 민족교회들을 들볶고 못살게 굴었다. 그중 제일 못할 일은 제1, 2, 3계명을 모두 범할 이른바 신사참배 강요였다. 민족교회가 일본의 잔인한 박해를 받아온 역사는 일본의 이 신사참배 강요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신사참배는 장로교회에서 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이 철저했다. 1931년 9월 경남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고 이를 부산일보가 보도하여 큰 화제가 되었다.
1936년 초에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실행위원회'를 소집하여 기독교 학교의 폐쇄 반대를 원칙으로 삼고 신사참배 절대 반대 운동을 펴다가 1938년에야 평양 내외 학교와 연희전문과 세브란스 의전 및 정신학교들이 자진 폐교하면서 결사반대의 뜻을 펼쳤다.
이같이 일본강점기 때 기독교 지도자들의 하나님 사랑은 민족 사랑으로 이어져 뜨거운 신앙심과 민족의식으로 언제나 백성들의 모범을 보였다. 양용근 목사 역시 신사참배를 반대한 불경죄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43년 12월 5일 광주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았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조선은 그때 하나였다. 민족도 하나, 마음도 하나였다. 그러나 자유가 오자 그 가운데 이념과 이권이 개입되면서 강대국들의 먹잇감이 되고 저들의 유익을 따라 이 나라가 분단되고 오늘에 이르렀다. 누가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누가 이 나라의 안위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가! 누가 북핵의 위협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가!
이 땅에 희망은 교회뿐이다. 교회가 아무리 망가졌다고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당하여도 이 나라 이 민족을 구할 길은 교회뿐이다. 오늘 바로 내가 하나님 앞에 바른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제2, 제3의 양용근 목사가 되어 이 나라에 해방을 주신 하나님 앞에 바르고 참된 신앙인으로 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기도자가 되자.
정리 : 허숙 권사 (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