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환경운동
교회역사 강의 - 한국교회사 50장면(마지막 강의)
세계 교회의 환경운동은 1970년대 정책화되었다. 1975년 나이로비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이하 WCC)의 제5차 총회는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JPSS: A Just, Participatory, Sustainable Society)를 공식 프로그램으로 받아들였다. JPSS는 자연이 지탱할 수 있는 수준에서 개발하자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무분별한 개발이 인류사회를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JPSS는 1983년 WCC 제6차 밴쿠버 총회에서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전’(JPIC: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으로 발전하였다. 여기에서 ‘창조질서의 보전’은 자연과 인간이 똑같은 피조물로서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적이라는 인식 아래 자연의 지속가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학적 사고였다. 이후 JPIC는 기독교 신학과 사회운동의 핵심개념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한국의 환경은 파괴되고 있었다. 정부의 제3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중화학공업이 활성화되자 환경문제와 피해사례가 속출하였다. 정부는 1963년 ‘공해방지법’, 1977년 ‘환경보전법’을 제정했지만 경제성장이 최우선인 상황에서 실효성은 없었다. 따라서 1970년대에 한국에서 환경운동은 없었으며 환경오염지역의 주민들이 피해보상을 위한 활동에 나선 사례가 발견될 뿐이다.
1982년 기독교와 가톨릭의 성직자들이 중심이 되어 탄생한 ‘한국공해문제연구소’(공문연)는 본격적인 한국 환경운동의 출발점이었다. 공문연은 기독교 성직자들의 기획으로 출범했다. 1980년 호주로 유학 간 인명진 목사는 호주 신문 ?시드니 모닝 헤럴드?에서 고리원자력발전소의 고장 소식을 접했다. 인명진은 한국의 시급한 문제를 민주화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호주에서 한국의 뉴스로 독재가 아닌 핵발전소 고장이 실리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만난 호주사람들은 한국의 민주화는 시간문제이지만 공해와 환경파괴는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정말 심각한 사안이라고 말했다.
1981년 귀국한 인명진은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인 권호경 목사를 만나 환경운동을 하자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호경은 환경문제를 다루는 조직을 만드는 것은 좋지만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경직된 사회분위기 때문에 ‘운동’이라는 말을 사용할 수가 없으니 ‘연구소’를 설립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톨릭에 동참을 제안하여 동의를 받았다. 이로써 1982년 4월 한국 최초의 환경운동단체 공문연이 출범하였다.
공문연은 공해피해가 발생하는 지역을 찾아다니며 실태조사를 진행하는 한편, 공개강좌를 꾸준히 열고 운동가 양성을 위해 노력했다. YMCA와 CBS 역시 공문연과 협력하며 공해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 일에 나섰다. 공문연은 1984년 5월 25일에 매년 6월 첫 주를 환경주일로 정하고 지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첫날인 1984년 6월 5일 한국에서 처음으로 “반공해선언문”을 발표하였다.
공문연은 울산 울주근 온산읍에서 발생한 환경병 ‘온산병’을 사회문제로 여론화하는데 성공했다. 1974년 공단으로 지정된 후 1980년대 초부터 괴질이 발행하고 있던 온산읍에 몇 년 간 실태조사를 진행한 공문연은 1985년 1월 7일에 결과 보고회 및 간담회를 열었다. 한국일보와 동아일보는 1월 18일자 신문에 이 보고회를 기사화하여 ‘온산공단 주변 주민 5백여 명이 이타이이타이병과 유사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보도하여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로서 온산병은 ‘한국 최초의 집단 공해병’이라는 전국적인 사회문제로 전환되었다. 환경운동이 전국적인 사회운동으로 전환되는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시민운동이 자유로워지고 다른 환경운동 단체들이 설립되자 공문연은 한국반핵반공해평화연구소로 개칭했다. 공해 문제를 넘어 반핵과 평화문제를 포함하는 진취적인 단체로 성격변화를 꾀한 것이었다. 때마침 JPIC세계대회가 1990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된 것은 한국교회에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1990년 감리회에 환경선교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1992년에는 우리 교단과 대한성공회의 환경보전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구세군과 기독교대한복음교회는 환경위원회를 조직하지는 않았지만 복음교회는 군산 주민들과 함께 동양화학의 공장철거를 위한 특별대책위원회를 구성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고 구세군은 폐식용유로 비누 만들기, 폐신문지 재활용 등 생활환경운동을 전개했다. 기독교 내의 분위기가 바뀌자 그동안 종교계와 시민계를 두루 아우르던 반핵반공해연구소는 1992년 이름을 ‘한국교회환경연구소’로 바꾸고 기독교 신앙에 입각한 환경운동단체로 전환하기로 결정하였다.
환경연구소는 1997년 “창조보전을 위한 기독교환경운동연대”(약칭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이하 기환연)로 이름을 바꾸면서 부설기관으로 한국교회환경연구소를 두기로 조직을 확대 개편하였다. 그리고 출범 선언문에서 “기독교환경운동의 연대로서 보수, 진보를 초월한 초교파적인 운동”에 대한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2010년대까지 환경문제는 진보적인 이념문제로 여겨졌고, 보수적인 기독교계에 환경운동의 대안을 제시한 것은 기독교윤리실천운동(기윤실)이었다. 기윤실의 자발적불편운동은 ‘먹을 만큼만 요리하기, 택배상자 재활용하기, 겨울철 내복 입기, 문풍지 부착하기, 쓰지 않는 플러그 뽑아두기’ 등의 개인윤리적 실천의 성격으로 정치적 부담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었다.
현재 기후위기는 이념이 아닌 생존 문제로 여겨지고 있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2021년 3월 ‘기후위기 기독교 비상행동’이 출범했다. 출범 당시 이 기구에 참여한 단체는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사회선교연대회의,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 기독교환경교육센터 살림, 기독교환경운동연대, 성서한국, 예수살기, 한국YMCA전국연맹, 한국YWCA연합회이었고 여기에 산울림마을교회, 서울제일교회, 샘터교회가 교회 단위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기환연은 2021년 5월 NCCK와 함께 ‘2050년 한국교회 탄소 중립 선언’을 발표했다. 이젠 교회도 환경을 생각하며 운영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동안 기독교의 신학은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이었다. 하나님의 평화는 인간과 인간사이의 문제라고 여겨왔다.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지구에서 인류가 살아갈 수 없게 될지 모른다는 위기 앞에서야 인간과 자연의 사이의 평화를 다시 생각하고 있다. 지금은 교회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보호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을 최우선으로 여길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