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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편으로 갑시다
눅 8:22-25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고,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고,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오신 목적대로 사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도 이렇게 거룩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배를 타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라고 명하시고 배에서 모처럼 잠을 청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못되어 광풍이 불기 시작했고 파도와 넘치는 물결 때문에 제자들은 큰 곤욕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제자들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급기야 주무시는 주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을 쳤습니다. 주님은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건너편으로 가자'라는 것은 새로운 목표에 도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가나안으로 가자는 것도 ‘건너편으로 가자’는 것이고, 청교도들이 신대륙으로 가자는 것도 ‘건너편으로 가자’는 것이고 빈곤과 싸우며 ‘잘 살아보자’라고 외치며 노력한 것도 건너편 세계로 가기 위한 것입니다. 누구나 건너편으로 가기를 시도합니다. 그런데 건너편으로 가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건너편으로 가는 동안 여러 장애물이 생기고 상상 못할 어려움들이 괴롭히고 갈 길을 가로막습니다. ‘도고일척(道高一尺)이면 마고일장(魔高一丈)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도를 한 척 높이면 마는 그 열배로 나를 괴롭힌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모두는 건너편으로 가야합니다. 우리에게도 반드시 건너편으로 가야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이 그렇습니다. 거센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아서 건너편으로 갈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광야에도 길을 내시고 사막에도 꽃이 피게 하십니다.

 1. 목적을 재점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것은 목적입니다. 길 가는 사람에게 목적지가 없으면 그는 나그네이거나 방랑자에 불과합니다. 가까운 길을 가든지 먼 길을 가든지 목적지는 분명해야 합니다. “그들이 갈릴리 맞은편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러 예수께서 육지에 내리시매 그 도시 사람으로서 귀신 들린 자 하나가 예수를 만나니”(26-27절) 주님께서 가시려는 곳은 거라사인의 땅이었고, 가시려는 목적은 귀신들린 한 사람을 만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거라사는 데가볼리에 속한 한 도시로 규모가 적지 않은 이방인의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직 한 사람, 무덤가에서 소리 지르며 괴이한 행동을 하고 있는 이 귀신들린 사람을 만나시기 위해 이 마을에 가신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에는 귀신들린 자를 고치신 후에 예수께서 배를 타시고 다시 맞은편으로 건너가셨다고 했습니다.(막 5:21)
 거라사의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께서 만나신 많은 사람들 중에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그의 안에 군대 귀신이 들어있다고 했으니 그의 모습은 거의 사람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람 하나를 만나시고 구원하시려고 풍랑이 심한 바다를 건너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함이고, 많은 사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함이고,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고, 오신 목적대로 사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목적도 이렇게 거룩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고생의 물을 마시고 수고의 떡도 먹어야 합니다. 미국 작가 Edgar Snow는 ‘인생은 찢어진 우산을 쓰고 폭풍우 속을 걸어가는 순례자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찢어진 우산을 쓰고 폭풍우 속을 걸어가되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걷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일하고 세상을 더욱 밝게 만들기 위해 봉사하는 좀 더 거룩한 목적을 향해 가야 하겠습니다.

 2. 건너편으로 가는 사람은 주님께서 함께 계심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예수님은 호수 건너편에서 동물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한 인생을 구원하시려는 극진한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이 아름다운 발걸음은 하늘도 돕고 땅도 돕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는 배에는 물이 가득 찼고 제자들은 죽음의 공포를 느꼈습니다.
성경은 고통의 문제를 많이 언급합니다.

 1)고통은 죄 때문에 왔습니다.(창 3장)
 2)고통은 믿음을 단련시키시는 과정에서 생깁니다.(욥 23:10)
 3)주님 위하여 십자가를 져야 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종들이 헌신과 희생의 십자가를 지므로 고통을 당합니다.(골 1:24)
 4)악한 세상에 살면서 원치 않는 고통에 직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의 내면은 타락한 본성이 자리 잡았고 세상에는 악과 죄가 너무나 일상적으로 존재하므로 이런 것들과 부딪치면서 인간의 고통은 더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힘들고 풍파 많은 세월을 지낼 때 전능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시듯 우리 삶을 다스려 주십니다. 성경에는 풍랑을 만난 배 이야기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풍랑에도 죽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거룩한 마음으로 걷는 인생길에도 풍랑은 있습니다. 괴롭고 힘들고 무섭기도 합니다. 그러나 두려워 맙시다. 잔잔케 하시는 주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3. 궁극의 질문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풍랑을 만난 일, 그리고 말씀으로 바람과 바다를 잔잔케 하신 일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경이로움에 모두가 놀라며 질문합니다.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물을 명하매 순종하는가”(25절). 이런 궁금증은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실 때 자주 나타났습니다. 이 질문에는 그들이 가진 거룩한 호기심이 있습니다. 이들의 질문에는 ‘혹시 이분이 우리가 기다리는 그 메시야가 아니시냐?’는 강력한 희망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질문에 인생의 해답이 있습니다. 프란시스 수도사는 매일 아침 기도하면서 ‘오 하나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그리고 저는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을 제일 먼저 했다고 합니다. 신앙은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이 당신을 바르게 알고 있는지를 궁금해 하시면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바울이 회개하기 전 다메섹으로 가다가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박해하느냐’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비명처럼 외친 질문이 있습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그때 예수님 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그 대답에 인생에 대한 바울의 질문이 한순간에 다 해소되었습니다.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할 지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순간 바로 깨달아졌고 다메섹에 들어가자마자 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다’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께서 메시야이심을 깨닫는 순간 인생의 모든 의문이 풀리고 목적이 발견되고 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무엇을 위해 내 인생을 바쳐야 할지도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보다 높은 목적을 향해 건너편으로 건너가려는 사람은 이 질문에 분명히 대답해야 합니다. ‘예수, 그가 누구신가?’ 이 질문에 바르게 응답하셔서 호수 건너편으로 향하는 인생행로가 주의 능력 가운데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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