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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03
28강 : 사도신경의 내용을 알고 믿는 유익 (2)

61문 : 당신은 왜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답:나의 믿음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실 만한 것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 의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제61문은 이신칭의에 관한 질문입니다. 내가 구원의 확신이 있든 없는 상관이 없이,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가 되는 유일한 방법이 믿음이고, 믿음이란 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의를 받아들이도록 믿음을 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신칭의, 곧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종교개혁자의 외침과 구호는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 판매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기념주일로 지키는 것은 10월의 마지막 밤에 마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였기 때문인데, 종교개혁의 시작을 알린 마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가운데 절반 이상이 면죄부에 관련된 내용입니다. 특히 21항에는 “그러므로 인간이 교황의 면죄부를 통해 모든 형벌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루터 당시에 교황의 면죄부를 통해서 모든 형벌을 면하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면죄부를 판매하러 다니던 설교자들이 있었습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교황의 말을 전하고 다니면서 면죄부를 구입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결국 루터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면죄부를 구입한 돈이 구원을 가능하게 한다는 가르침을 반대하였습니다.
 한편, 52항은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비록 면죄부 담당 주교나 교황이라 할지라도 자기 영혼의 안전을 위해 면죄부에 의한 구원을 믿는 것은 헛된 일이다.” 자기 영혼의 안전을 위해 믿음에 의한 구원을 믿는 것이 아닌 다른 무엇인가에 의한 구원을 믿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루터 당시에는 그것이 면죄부였을 뿐입니다. 어떤 시대에는 착한 행실이, 어떤 시대에는 은혜가 없는 믿음 곧 신념이 자기 영혼의 안전 곧 구원의 확신을 위해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루터는 95개조 반박문 마지막 항목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95항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평화에 대한 잘못된 확신을 통해서가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확신하여야 한다.” 고난 없이 천국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구원의 확신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으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마 5:10)”
 장로교 전통에서 구원의 확신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칼뱅은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는 신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못 박았습니다. “구원의 확신에 의지해서 악마와 사망에 대해 자신있게 승리하는 그 사람 외에는 아무도 신자가 아니다(기독교 강요 3.2.16).” 칼뱅이 구원의 확신을 중요하게 말했지만, 어떤 맥락에서 말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구원의 확신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했고, 믿음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구원의 확신이 함께한다고 했으나, 구원의 확신이 의식 가운데 포착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믿음과 확신 사이의 간격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데도 의식하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만약, 인지부조화 상태 ㅡ 두 가지 이상의 반대되는 믿음, 생각, 가치를 동시에 지닐 때 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과 반대되는 새로운 정보를 접했을 때 개인이 받는 불편한 경험이나 정신적 스트레스 ㅡ 가 “구원의 확신” 때문에 생겼다고 하면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구원의 확신”이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은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분의 의가 나의 의가 되었다는 확신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내가 내 이성을 사용해서 교리에 대한 지적 동의 과정을 거치고, 내가 내 의지를 사용하여 내 마음을 열어서 생긴 확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통해서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62문 : 우리의 선행은 왜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으며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습니까


 답: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는 의는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최고의 행위라도 모두 불완전하며 죄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선행’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 사이의 상관관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무 관계 없음’입니다.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에 ‘의의 한 부분’이라도 될 수 없습니다.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합니다.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많은 오해가 발생하는 경우를 분석해 보면, 그 주된 오해의 원인은 ‘그릇된 자기 확신’과 ‘서로 다른 기준’에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너에게 이만큼 해줬는데, 네가 나에게 해준 것이 뭐가 있느냐?”는 질문을 통해서 ‘아무 관계 없음’이라는 개념을 ‘그릇된 자기 확신’과 ‘서로 다른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두 가지 차원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너에게 이만큼 했다”는 “나의 행위”가 상대방의 호의적인 반응을 이끌어 낼 것이라는 그릇된 확신입니다. 특히 스토킹의 원인은 바로 이러한 그릇된 확신에서 비롯됩니다. 범죄행위로 분류되는 스토킹의 경우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너에게 이만큼 하면 너도 나에게 이만큼 해야지.... 사람이라면...” 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접근을 합니다. 이는 그릇된 자기 확신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이만큼” 했다는 행위를 설명하는 ‘기준’과, 상대방이 “해준 것이 없다”는 행위를 설명하는 ‘기준’에, 곧 서로 다른 기준에 대한 점검입니다. 자신이 행한 것에 대해서는 스스로 대단한 업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상대방이 행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상대방에 대해서는 엄격합니다. 자신이 상대방에게 한 것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고 있으면서 상대방이 자신에게 한 것에 대해서는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선행과 하나님 앞에서의 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엄청난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간혹 하나님이 나에게 해 준게 뭐가 있느냐고 따질 때가 있을 것입니다. 의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과 인간의 기준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의의 기준은 절대적인 기준입니다. 절대적인 기준이란 99.9%가 아닌 100%를 말합니다. 사람의 기준은 99.9%의 순금도 순금으로 인정하지만, 하나님의 기준은 100.0%입니다. 절대적으로 완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해야 합니다. 비록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세상에서 행한 최고의 선행이라고 하더라도, 타락한 본성에서 나온 선행은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이는 마치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유죄선고를 받아 감옥에 있는 장기수가 선행을 해서 모범수가 된다고 하더라도 유죄선고를 무죄로 되돌릴 수는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