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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0
29강 : 사도신경의 내용을 알고 믿는 유익(3)

63문 :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행에 대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상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래도 우리의 선행은 아무 공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답 : 하나님의 상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
 62문에서 언급한 선행과 63문에서 언급한 ‘선행’이 단어는 같지만,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단어를 말할 때의 분위기와 맥락 그리고 상대방과의 관계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업무에 집중하느라 혹은 다른 일을 하느라 ‘단톡방’에서 갑자기 올라오는 피드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맥락이나 분위기를 알지 못할 때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한국말로 이야기하는데도 이해를 못할 때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62문에서 말하는 선행이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지 못하는 선행으로 타락한 인간 또는 그리스도의 의로 의롭게 되기 이전의 인간이 행한 일을 말합니다. “죄인이 행한 선행은 선행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지만,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 있습니다: “선행이라고 다 같은 선행이 아니라, 죄인이 행한 선행은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있는 선행은 아닙니다.”
 63문에서 말하는 선행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의롭게 된 인간이 행한 일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의롭다고 인정받은 인간이 행한 선행이라면, 그 선행으로 말미암아 상을 받는다고 했을 때, 선을 행한 사람에게 지분이 얼마나 있는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하나님께 인정받고 상을 받는다는 말은 선행을 한 사람을 봐서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봐서 선행으로 인정하고 상을 주시겠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행으로 하나님께서 상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그 전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것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 전제를 분명히 할 때, “하나님의 상은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니고 은혜로 주시는 선물입니다.”는 말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행위에 대한 댓가로 주어지는 포상과 행위와 상관없이 주어지는 선물은 다릅니다.


64문 : 이러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답 :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64문에서 말하는 “이러한 가르침”은 앞에 나온 제63문답을 가리킵니다. 제63문답에서 무엇이라고 가르치고 있기에, 이러한 가르침이 사람들을 (선행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들고, 또 그 결과 사람들이 사악하게 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는 것일까요? 64문은 제63문답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 나올 수 있는 질문이기에 다루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64문이 나오게 된 논리적인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선행에 가치를 두지 않고 또 선행에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굳이 선행을 할 이유를 찾지 못하게 되어 선행에 무관심하게 될 것이고, 선행을 하지 않게 되면 선이 결핍이 되어 그 결과 악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는 질문이기는  하지만, 선행과 은혜와의 관계를 분명히 이해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선행과 은혜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선행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선행하는 은혜’ 때문이고, 이 선행하는 은혜에 대한 응답이 선행의 동기가 되며,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 선행입니다. 64문답에서 언급하고 있는 참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고 믿고 의롭게 되었다는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고백으로 표현됩니다. 그러면, 상급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상급을 포상 및 뇌물과 혼동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포상은 행위에 대한 댓가로 지급되는 것이며, 뇌물은 나의 행위를 이끌어 내기 위한 댓가성 물질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선물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상급을 포상이나 뇌물과 연결시키면 64문의 질문이 나올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봐야 포상으로 주어지는 것들이 없다면, 기본만 하자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니까요. 그러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도 은혜로 여기는 사람은 포상을 받든지 받지 않든지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감사하면서 일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만약 모든 것이 당연한 일이라면, 포상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 아닙니까? 네, 그렇습니다.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하는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이것 역시 은혜입니다.

정리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인용할 수 있는 많은 성경의 이야기들 가운데, 누가복음 15장에 기록된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는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이야기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은혜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이 비유가 강력한 메시지를 주는 이유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이 대조되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큰 아들과 작은 아들 가운데 누구와 자신을 동일시 하십니까? 아버지와 늘 같이 있으면서도, 아니 어쩌면 늘 같이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던 큰 아들. 반대로 아버지로부터 떨어져 있고, 돈도 떨어져 보니 거저 주어지는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작은 아들. 작은 아들은 고생을 통하여 은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은혜란 값없이 주어지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큰 아들이나 작은 아들이나 동일하게 아버지로부터 값없이 주어지는 선물을 받았고 누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물에 대해서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큰 아들의 경우는 받고 누리는 것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렇지 않은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다른 각도에서 표현하면, 은혜를 은혜로 여긴다는 것은 받은 것과 누리고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연결됩니다. 마치 거지꼴을 한 작은 아들이 스스로를 품꾼 중의 하나와 같이 여기면서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내가 받고 누리고 있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은 내가 지금까지 누리기 위해서 준비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행위가 있었다는 우월감,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많은 일을 했기에 일한 만큼 받아야 한다는 보상심리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만약 일한 만큼 받는 사람, 또는 받는 만큼 일하는 사람들이 프로라고 한다면 여전히 우리는 아마추어, 곧 그 일을 좋아해서 대가에 대한 큰 기대없이 하는 사람들이고, 또 그래야 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받은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태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