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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1-19
사회복음주의와 적극신앙단 사건

 사회복음주의 운동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미국에서 일어난 신학적 운동으로 개인의 구원을 넘어 사회의 기독교화를 꿈꾼 운동을 말한다. 당시 미국은 산업의 발전에 따른 여러 부작용을 경험하고 있었다. 특히 경제적 양극화로 인한 노동자의 불만은 매우 심각하였다. 사회복음주의를 처음 천명한 사람은 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를 작사한 워싱턴 글래든(Washington Gladden)이다. 그는 이제 더 이상 노동과 자본의 문제는 다만 경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이자 종교적인 문제라며 교회가 사회정의를 세우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복음주의의 예언자라고 불리는 라우쉔부쉬(Walter Rauschenbush)는 죄를 개인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구조와 제도 안에도 죄가 있으며 이것이 인간의 양심을 무력화하고 악의 왕국을 더 크게 확장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악이 사회적이라면 복음도 사회적이어야 하기에 만약 구원이 단지 개인적 영역에 머물러 있다면 이는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구원받은 이들에게는 사회를 복음화하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책임이 있다고 이야기했다.
 이런 사회복음주의는 1920년대와 30년대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때에 따라 사회복음주의를 수용한 이들과 교단 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런 갈등 중 대표적인 것이 적극신앙단 사건이다. 적극신앙단은 YMCA 총무인 신흥우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신흥우는 일찍이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유학한 후 귀국하여 배재학당 교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20년부터 YMCA총무로 활동하며 YMCA의 농촌운동, 실력양성 운동 등을 비롯한 다양한 운동을 추진하였다. 또한 기호지역의 친 이승만 계 리더로 활동하면서 1920년대 대미 외교 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평소부터 신앙의 실천에 관심을 많이 기울였다. 1926년에는 기독교연구회를 결성하였는데 이 단체의 목표는 ‘기독교의 민중화’와 ‘신앙의 실체화’에 있었다. 그러던 중 1928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국제선교대회를 참가하고 기독교 사회운동에 대해 더욱 확고한 신념을 갖는 한편, 기독교의 토착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선교사로부터 독립한 한국인 중심의 실천적인 신앙생활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1932년에 결성된 적극신앙단이었다. 적극신앙단은 주로 YMCA와 감리회의 인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지만 함태영, 전필순, 최거덕, 권영식 등과 같은 장로회 목사들도 참여하는 초교파 신앙단체였다.
 이들은 한국의 기독교가 시대의 요청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한다며 사회복음주의의 성격이 강한 ‘적극신앙선언 5개항’과 ‘생활개선을 위한 21개조’를 제시하였다. 신앙선언의 5개항은 ‘하나님과의 일치, 남녀의 완전한 평등, 완전한 자유, 경제·문화·정신적 생활의 승등적(昇登的) 균형과 안전’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런 사회복음주의 성격을 가지는 선언은 1930년대 여러 단체에서 발표되었다. 1930년에는 감리회 총회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가 천국”임을 믿는다는 내용이 포함된 ‘교리적 선언’과 사회를 기독교적 이상 사회로 만들기 위한 기조인 ‘사회신경’을 채택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사회신조를 발표하였다. 공의회는 공산주의의 과격한 사회변화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한 사회의 변화가 진정한 변화라고 강조하며 교회가 추구하는 이상 사회의 모습을 밝혔다.
 감리회와 조선예수교공의회의 사회신경과 신조가 교계에서 무리 없이 수용된 것과 달리 적극신앙단의 활동은 큰 논란이 되었다. 이번에도 문제가 불거진 것은 장로회였다. 적극신앙단이 내세우고 있는 반보수주의, 반선교사 등의 기치는 장로회로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결국 장로회 총회는 적극신앙단을 이단시하면서 참여하는 목사들의 면직과 신흥우의 YMCA 총무직 사임을 결의하였다. 결국 신흥우가 YMCA에서 물러나면서 적극신앙단 운동도 중심을 잃고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런데 일반 역사학계에서는 적극신앙단이 나치즘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신흥우는 1920년대 내내 친미적 성격을 가진 자유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 미국이 겉으로는 정의와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약소국을 침략하고 있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끼고 나치즘에 빠져들었고 적극신앙단을 결성할 당시에는 이미 독재정치를 옹호하는 파시스트의 모습을 보였다. 애당초 적극신앙단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도 '히틀러전'에 나오는 ‘히틀러가 적극기독교를 주장하여 독일 민족의 단결을 이끌어냈다’는 이야기를 읽고 얻은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신흥우는 히틀러의 운동방식을 채택했을 뿐 파시즘의 논리를 수용한 것은 아니라는 옹호론도 존재하지만, 적극신앙단 전체는 몰라도 신흥우 개인은 파시스트의 일면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