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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15
가장 큰 감사
요 6:52-59



영생은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사이며 거듭난 사람이 누릴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영생은 장차 천국에서 시작되는 삶이 아니라 이미 믿음을 고백하고 거듭난 날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빈들에 모인 사람들에게 주님의 임재와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긍휼, 희생하시려는 마음, 현실에 대한 감사가 있었을 때 변화의 기적이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의 떡은 한순간 모두를 흥분시키고 황홀하게 만들었지만 인간 본성에는 근본적인 변화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일에 생각이 머물러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고 또 떡을 얻기 위해 주님 계신 곳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주님께서 기적의 떡을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32-33). 그리고 이어서 하늘에서 참 떡을 주실 터인데 그 떡은 영원히 죽지 않게 하는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요 6:49-51절)

 1. 같은 현실 다른 처방
 오랜 식민지배의 고통, 권력층의 부패와 정의의 실종, 의인 세례요한의 죽음과 이에 대하여 침묵하는 예루살렘의 정치권과 종교 세력들, 무기력한 군중, 배고프고 병든 서민들, 냉정한 민심 등 당시 현실은 어느 것 하나 온전치 못했고 이에 대하여 책임 있게 나서는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목자 없는 양떼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자는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왕이 아닌 생명의 떡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문제의 본질이나 대책도 인간의 변화에 있다고 보셨습니다. 사람들의 논란의 출발은 먹는 문제 즉 경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경제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주님의 해법은 세상의 방법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습니다.(마 6:31-33) 문제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과 하나님의 의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다 먹고 마실 만큼 충분히 주시는데 인간 사회에 서로 나누고 섬기는 하나님 나라의 원칙이 실종되고, 약한 자들을 돌보고 베푸는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진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사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 많은 먹거리를 구하지 말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현실이지만 진단이 다르니 처방도 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줄곧 사람의 변화를 말씀하셨습니다.(요 4, 5, 6 장) 그런데 사람의 변화가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인류 역사의 과정은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교육, 문화,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럼에도 사람의 본질은 더 악하여졌고 새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십니다. 새 길은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니라”(29절)고 하셨고,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36절)라고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40절) 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사람도 바뀌고 세상도 바뀌는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 믿음이 없음을 탄식하셨습니다.

 2. 믿음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우리는 믿음을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는 유신론자의 입장에 서는 것, 그를 의지하는 것, 그의 도우심과 사랑을 확신하는 것 등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믿음은 좀 내용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48절)고 하시면서 당신이 주시는 떡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생명의 떡인데 곧 자기 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명백하게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우리 위한 희생제물 삼으실 것에 대한 결연한 의지의 고백이면서 사람이 구원 받고 새 피조물 되는 것은 이 방법뿐임을 천명하시며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53, 55절)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주님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 합니다. 내가 내 삶의 주체가 되고 주인 되는 삶을 버리고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주인 되어 나를 다스리시는 삶을 주님 과 연합한 삶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연합한 삶은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 신 주님을 영접하므로 그는 내 안에 나는 그 안에 사는 사람이 되고 그의 죽으심은 내 죄의 대속 제물이 되고 죽어도 다시 사는 예수님의 생명이 내 안에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3. 영생의 삶은 무엇인가?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영생’ 이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습니다. 영생은 단순한 ‘영혼불멸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영생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과의 새롭고 영원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서 그의 구원의 은총 가운데 영원히 사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영생은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사이며 거듭난 사람이 누릴 영원한 삶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영생은 장차 천국에서 시작되는 삶이 아니라 이미 믿음을 고백하고 거듭난 날부터 시작된 것이어서 우리는 이미 영생의 일부분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57절). 영생의 삶이란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사신 주님처럼 아버지의 뜻을 행하고 사는 것이며 더 온전한 영생의 삶인 하나님 나라의 삶을 목표하고 살아가는 삶입니다. 때문에 영생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세상 욕망에 사로잡힌 삶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영생은 영광스럽고, 평화롭고, 지극히 은혜롭습니다. 오직 믿음 한가지 때문에 이런 영생의 축복이 우리에게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에 이르기까지 우 리는 이 세상에서 영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속에 물들지 않 고, 천국의 가치관을 따라 경건과 절제를 추구하고 예수 정신인정의, 사랑, 평화를 실천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영생의 가치를 이 땅에서 실천할 때 비로소 세상에는 희망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삶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7-8). 이것이 영생 얻은 사람이 살아가는 영생의 길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감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그의 은혜로 죄 사함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과 영생의 축복이 약속된 은혜입니다. 이보다 더 크고 근원적인 은혜는 없습니다. 이 큰 은혜를 주시려 주님은 친히 십자가에서 그 살과 피를 우리 위한 영생의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영생의 양식을 먹는 성도들에게 영생의 길을 걷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