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계시적 존재로 살아야 하고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상에 투영하는 계시 공동체로 존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다스리시는 방법도 단순한 권선징악의 논리가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고 사랑으로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세상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역사하셔서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롭지 않으심도 아니고 정의의 심판을 행하실 능력이 부족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사랑 때문입니다. 구약 학자인 유니온 신학교의 James L Mays 박사는 이사야 주석에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집요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추적하시고 끝까지 따라오시면서 마침내 설득해내시고 건져 내시는 결코 포기하실 수 없고 버리실수 없는 우리를 향한 극진한 사랑이 하나님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1. 하나님 사랑의 증거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신앙의 역사가 시작되면 서부터 전제된 사항이었습니다. 범죄한 아담을 찾아가셔서 가죽옷을 입히시고, 동생을 죽인 가인을 위해서도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아브라함을 선택 하신 것도 일방적 은혜에 의한 역사였습니다. 모든 역사가 하나님 사랑의 역사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들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고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보다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 사랑의 증거는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를 우리 위한 대속제물 삼으신 일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명백한 하나님 사랑의 눈부신 증거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시고 그를 우리 위한 화목제물 삼으신 일입니다.(9-10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루터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 사람이 나 한 사람뿐이었어도 독생자를 주셨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독생자 주신 은혜를 흔히 대속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매를 맞으셨고, 대신 죽으셨고, 대신 값을 지불하셨습 니다. 그래서 우리를 ‘그 피로 사셨다’고 했습니다. 우리 죗값을 지불하셔서 죄와 형벌로부터 자유하게 하셨고, 우리 몸값도 지불하셔서 우리를 의인되게 하시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대속의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 죗값을 위해 독생자를 보내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 사랑이요, 은혜입니다. 죄인을 위해 대신 죗값을 치러주시는 것도 은혜요, 예수의 피를 보시고 그것을 우리 죗값으로 받아주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요 3:16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여 독생자를 보내신 일이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사랑이며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이 하나님 사랑의 절정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 9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우리에게 나타났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 사랑에 늘 감격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사랑받은 사람의 삶
이 시대는 공동체 의식이나 배려, 관용, 헌신 등의 모습들은 점점 사라지고 경쟁, 배타성, 개인주의 등이 더욱 심화되는 모습입니다. 이것은 사랑받고 배려 받을 수 있는 삶의 현장이 거의 사라진 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해석됩니다.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으니 사랑하기도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체험하고 그 사랑에 감사 감격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10-11절).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지금도 그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사랑받은 사람답게 서로 사랑하고 사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의 참 모습이 독생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 모습 속에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소서’라고 요청하는 빌립에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존재와 사역과 성품 가운데 하나님의 모습이 충분히 드러났고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참 모습을 충분하게 보여주는 것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아무도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우리가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살면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참 모습이 드러나 보이게 됩니다.(12절)
우리 모두는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계시적 존재로 살아야 하고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모습을 세상에 투영하는 계시 공동체로 존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이 보여질 때 우리 신앙의 정당함은 인정받게 되고 예수께서 우리 구원의 주님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한없고 설명 할 수도 없는 사랑을 받고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되고 영원한 소망까지 누리게 되었는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형제 사랑으로 실천하면 우리 모습에서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게 되고 이 모습 때 문에 지켜보는 사람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일들이 이루어질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3. 전진된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그 사랑의 진정성을 의심해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형제들을 사랑해야 합니다.(19-21절) 여기서 형제는 누구입니까? 피를 나눈 혈육이기도 하고 삶을 같이 하는 친구이기도 하지만 나와 함께 같은 시대 같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한정의 모든 사람을 사랑할 마음도 없고 능력도 여유도 없습니다. 그리고 내 사랑이 싸구려가 아닌데 하찮은 것으로 취급당하거나 기만당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망설여지고 주저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가 내가 사랑해야 할 내 이웃입니까’라고 묻는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자비를 베풀어야 이웃이 생긴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은 매우 거칠고 험했습니다. 때로는 피곤하셨고 때로는 슬퍼하셨고 때로는 분노하셨습니다. 반대도 극심 했고 중상모략과 음해도 뒤따랐고 비웃음과 조롱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한순간도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그 마음에서 벗어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기독교의 특성은 공동체성입니다. 그래서 전 세계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한인들이 살면 교회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우리는 개별로 존재 할 수 없습니다. 서로 낯선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 공동체를 만드는 독특한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렇게 낯선 사람들이 만나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는 영성의 가장 큰 핵심은 서로 사랑하는 것에 있습니다. 초기 교회는 이 영성이 생명이었고 존립 능력이었습니다. 이웃 사랑의 영성, 형제 사랑의 진정성이 우리의 가장 강점이며 특성입니다. 이 능력이 회복되어야 교회는 평안하고 든든히 서 갈 수 있게 됩니다. 미 움, 분열, 갈등, 상처 등을 극복하는 십자가 사랑의 실천을 통해 하나님 사 랑을 실천하는 진정한 코람데오의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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