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례 또는 성사의 개념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성례 또는 성사의 개념이 언제부터 생기기 시작했을까요? 이 질문은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인정하는 두 개의 성례와 로마 가톨릭에서 인정하는 일곱개의 성례가 숫자상의 차이 뿐만 아니라 의미상의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질문입니다. 말하자면, 이 질문은 이른바 성사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전거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처음 세례와 성만찬이 행해진 시점과 원시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세례와 성만찬이 성례로 인정받은 시점 사이에는 간격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데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받은 세례는 아직까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세례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나 제자들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직접 베푼 세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나눈 최후의 만찬은 실제적으로는 유월절 음식으로 아직까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성만찬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마태복음 26장 17-19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예수께서 시키신 대로 하여 유월절을 준비하였더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사실과, 제자들에게 빵과 포도주를 주셨다는 사실 그 자체를 성례/성사의 원형으로는 볼 수는 있지만, 성례라는 개념으로 재해석된 것은 사도바울의 해석을 통해서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성례로 인정하는 세례와 성만찬을 이러한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은 성례의 원형으로 행해진 사건 자체와, 성례로서 재해석된 사건 사이에는 간격이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종교개혁 전통에서 성례로 인정하지 않는 다른 예를 들어 이야기를 해보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데, 혼배성사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성경의 진술대로라면, 인류 최초의 결혼은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셔서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오늘날 로마 가톨릭 교회의 일곱 성사 가운데 하나인 “혼배성사”라는 관점에서 파악하면서 “성사”라는 수식어를 붙인다면 시대착오적인 - 오늘의 개념을 옛 사건에 그대로 투사하여 만들어내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면 성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65-68문을 통해서 성례가 무엇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65문 : 오직 믿음으로만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덕에 참여할 수 있는데,
이 믿음은 어디에서 옵니까?
답 : 성령에게서 옵니다. 그분은 거룩한 복음의 강설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며, 성례의 시행으로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성례가 무엇인지 설명하기에 앞서서 65문에서는 성례의 중요한 전제가 무엇인지를 짚어 줍니다. 65문답에는 중요한 키워드 셋이 있는데 각각의 키워드는 성례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무엇인지, 그 유익을 얻을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수단은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말해줍니다.
첫 번째 키워드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일상적인 일’을 ‘거룩한 일’로 만드는 방법입니다. 예를 들어, 먹는 일 곧 식사는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식사가 거룩한 일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성만찬이 됩니다. 늘 먹는 빵이 늘 먹는 포도주가, 믿음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덕에 참여하는 성만찬이 된다는 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두 번째 키워드는 은덕입니다
은덕, 은총, 은혜 모두 비슷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은총이나 은혜라는 용어대신 은덕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은혜와 덕성을 한꺼번에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굳이 두 개념을 나누는 이유는, 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선물로 주어지는 것인데 비하여 덕성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같이 우리 삶으로 드러나는 덕목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힘과 노력으로는 그리스도교적 덕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아홉 가지 열매를 스스로 맺을 수 없기에 성령의 열매라고 합니다.
세 번째 키워드는 성령입니다
65문에 대한 답에 성령이 언급되어 있는데, 성령의 역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분은 거룩한 복음의 강설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며, 성례의 시행으로 믿음을 굳세게 하십니다.” 제65문답에서 주목해야 하는 성령의 역할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거룩한 복음의 강설로 우리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강설이란, “학문이나 종교에 대한 주제를 토론하고 풀이하여 설명하다”는 뜻으로 일방적인 선포라 할 수 있는 설교와 달리 토론하고 이해할 때까지 설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신앙강좌부에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다루는 것을 강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성령께서 지혜의 영으로 함께 하셔서 우리의 마음에 믿음을 일으키게 하실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일상적인 일을 거룩한 일로 만드셔서 우리의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일입니다. 일상적인 일을 거룩한 일로 만드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입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성령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은 칼뱅의 성례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은 독일내 칼뱅파의 신앙고백이고, 칼뱅의 성만찬 이론은 영적임재설인데, 이는 성만찬의 자리에서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임재하신다는 성만찬이론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영이기에 성만찬의 식탁에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은 성령의 임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일상적인 일을 거룩한 일로 만드는 일뿐만 아니라 성례의 시행으로 믿음을 굳세게 하는 일 역시 성령의 역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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