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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4
2024 사명자대회 하나님 사랑으로 우리를 덮으소서!

 11월 18일(월요일)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창 1:26-31)>
 행복은 세상의 제도나 사상이나 문화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확실하게 보여주시지만 사실은 세상을 만드실 때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는 다음의 세 가지로 기본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① 하나님께서 홀로 하셨다.
 ②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만드셨다.
 ③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조화롭게 만드셨다.
 이렇게 세상을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는 인간을 만드시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형상대로 만드셨습니다.(26절) 우리는 흔히 ‘형상’을 외모로 생각하지만 ‘형상’은 '속성', 혹은 '성품'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내면을 닮도록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대화와 소통이 가능한,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만물의 청지기로서의 역할과 만물을 누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아담을 먼저 만드시고 후에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뽑으셔서 그것으로 하와를 지으셨을 때 아담은 하와를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로다' 라고 감탄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실 때 처음부터 서로 사랑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랑의 공동체로서의 인간 세상을 만드셨습니다.
 행복은 혼자만이 누릴 수 있는 독점적인 것이 아니라 공존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자연과 더불어 공존하고, 이웃과 더불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고 무엇보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룰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이 금지시킨 선악과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과의 조화가 깨어졌고, 그러면서 사람 사이의 조화도 깨어졌고, 자연과도 조화도 깨어지게 되면서 땅에서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인간에게 고통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말씀합니다. 역사가 고통스럽고 개인의 삶이 혼란스럽고 세상은 전쟁의 연속이고 모든 일에 불평과 원망뿐인 혼돈 속에서 다시 행복해지는 길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은 오직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화평하십시오. 하나님과 조화를 이루십시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노력하십시오. 그리하시면 우리를 극진히 아름답게 만드셨던 창조 때의 그 모습으로 회복되는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11월 19일(화요일)
 <광야 길에 임하신 하나님 사랑(출 40:34-38)>
 사람들은 힘든 삶을 두고 인생이 광야 길과 같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대표적인 광야 길은 애굽을 출발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까지 40년 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았던 광야를 말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의 40년은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과 사고로 얼룩진 시간들이었지만 극심한 고난 가운데서도 마침내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성취를 누릴 수 있는 축복의 시간이었습니다.

 1. 항상 현실을 정확하고 냉정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로 들어서자마자 마실 물이 없는 고통에 직면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냉혹한 현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뒤로 돌아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가나안으로 들어가기까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궁중에서 공주의 양자로 40년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망명자가 되어 쫓겨나 양치기로 살게 되었을 때, 그때도 그는 양치기의 삶을 성실하게 감당했고, 하나님은 그런 그를 사용하셔서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현실 속에서 성실하게 자기의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과 함께 계십니다.

 2. 이스라엘은 광야에 성막을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상을 영위해 나가는 것도 간단치 않은 상황에서도 성막을 짓고 매일 제사를 드리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성막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상징이었고 실제로 하나님을 만나면서 이스라엘은 광야를 지나갈 수 있는 힘을 얻었습니다. 어려울 때마다 회막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성막을 지으라고 하시는 말씀의 신비를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성막으로 나갈 때마다 또한 사막을 지나게 하시고 또 한 고비를 넘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바라보십시
 광야 길에서 나타난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며 항상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그런가하면 구름기둥, 불기둥은 보호의 상징입니다.
 광야는 분명 힘들고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감당키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멸망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으로 말미암아 살아남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성막과 더불어 살아가며 구름기둥 불기둥을 보면서 하나님을 확인하며 친히 뵙는 믿음으로 주어진 현실을 인정하고 길을 찾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광야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지 못합니다. 믿음이 결정합니다.

 11월 20일(수요일)
 <성민이 되게 하신 하나님 사랑(신 7:6-11)>
 이스라엘 민족은 '우리 조상들은 방랑하는 사람들로서 애굽으로 내려가 거기서 소수민족으로 거류하였다'고 자기들의 뿌리를 설명합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을 조상들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하신 분이라고 설명합니다. 갈대아 우르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중심지였고 고대 바벨론 문명의 핵심지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날 때 그런 문명을 가지고 오지 못했고 다만 출산하지 못한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함께 몸만 나왔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6절). 초기의 이스라엘은 방랑하는 유목민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신분을 하나님의 성민이라고 설명합니다. 성민, 곧 거룩한 백성이라는 말은 첫째로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둘째로 바쳐진 백성이라는 뜻입니다. 셋째로 특별한 사명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또 하나님께서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주셨다고 합니다. 기업은 소유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기업이란 하나님께 소유되었다는 말과 함께 하나님께서 이 민족이 크게 발전하고 장성할 수 있도록 날마다 관리하시고 축복하시고 도와주시며 책임쳐 주시는 민족이다라는 의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상호 소유 개념으로 설명하며 불가분리의 관계에 놓여있는 민족의 정체성을 계속적으로 말-합니다.(신 30:9-10, 습 3:1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소유된 백성으로 삼으셔서 심혈을 기울여 양육하시고 그들을 기뻐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의 수효가 많고 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 삼으시고 기업으로 삼으신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매우 큰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많았고, 죄를 짓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증거는 애굽의 종 되었던 이스라엘을 속량해 내신 것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셨지만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그 어떤 댓가를 요구하지 않으시고 무조건적으로 자유를 주시고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백성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이 광야공동체였던 이스라엘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입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할지니라”(신 7:11)
 우리를 지금까지 사랑하시고 앞으로 영원히 사랑하실 하나님께서 당부하시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시고 지켜 살아갈 것을 다짐하는 이 아침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1월 21일(목요일)
 <버려진 자에게 임한 하나님 사랑(삼하 5:1-5)>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었습니다. 총리가 되기 전까지 요셉의 생은 너무나 고통스럽고 절망적이었습니다. 요셉은 버려진 사람이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 가족들로부터 버려진 사람, 잊혀진 존재였던 그를 하나님은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 역시 버려진 자리, 잊혀진 자리,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리에서 하루 아침에 왕의 자리에 앉게 된 사람입니다. 다윗의 이름은 ‘사랑 받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다윗은 청년 시절을 무척 고통스럽게 보냈습니다. 사울이 악령이 들어서 고통을 당할 때 다윗이 사울의 곁에서 수금을 타고 찬송을 부르면 악령이 떠나가는 역사가 나타나면서 그때부터 왕실과 인연을 맺게 되고 사울의 측근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후에 전쟁에 나갔다가 골리앗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독하는 말을 듣고 격분하여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큰 승리를 거두면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승리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요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라’는 노래로 다윗에게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칭찬이 오히려 화근이 되어 그때부터 다윗은 사울에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었고 암살의 협박에 시달리면서 칼을 피해 광야를 전전하며 사는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기간이 줄잡아 10년은 되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늘 쫓겨다니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외로웠습니다. 그 누구도 억울한 다윗의 편에 서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윗은 홀로 울고, 홀로 기도하고, 홀로 짐을 지면서 외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잊혀진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어느 날 왕으로 세우십니다. 완벽한 역사의 반전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역사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으로 평가 받게 됩니다. 그 이후로 그는 세 차례나 왕의 즉위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40년간의 통치를 통해서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본이 되었던 지도자로 평가를 받게 됩니다.
 다윗은 죽기 바로 전에 지은 찬송에서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 되시고 나의 요새가 되시고 나를 건지시는 분이 되시고 피할 바위가 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다고 고백합니다.(삼하 22:2)
 때때로 우리도 자신이 버려진 사람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짐은 무겁고 갈 길은 먼데 곁에는 아무도 없어 너무 외롭다고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이 우리를 망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 가운데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때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으십시다!
 그 사랑 앞에 내 자신을 내어 맡기십시다!
 외로울 때도, 버려질 때도, 잊혀질 때도 함께 계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십시다!

 11월 22일(금요일)
 <십자가에서 이루신 하나님 사랑(눅 23:39-43)>
 구약 성경에서 소개된 하나님의 사랑은 신약으로 넘어오면 더 적극적인 사랑으로 표현됩니다. 이 사랑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예수님을 보내신 사랑은 가장 극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으셨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토브’라고 하는 ‘좋다’는 이 단어는 단순한 감정의 차원을 넘어 사람에게 선하고 도덕적인 성품을 심어주신 하나님께서 그 모습대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스러웠다는 포괄적인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를 지으면서부터 그 좋은 모습이 점점 사라지고 하나님의 근심거리가 되고 탄식거리가 되어 마침내는 독생자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이 땅에 보내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조차 자신을 못 박는 무리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인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 양편에 달린 두 강도 중 한 강도는 예수님을 비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비방한 사람은 이 강도뿐만 아니라 대제사장도 로마 군병도 군중들도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대해서 한 마디도 대꾸하시지 않고 털 깎는 자 앞에 선 어린 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다른 한 강도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회개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신학자 제롬은 이 부분에 대해 '십자가의 고통이 그의 영혼을 일깨워 회개하게 했다. 사람은 편안한 침상에서는 회개하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평생이 아름답지 못했고 극형에 처해질 만큼 큰 죄를 지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의 고통이 한 사람에게는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내뱉는 것으로 나타났고 또 한 사람에게는 자기를 돌아보면서 회개하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회개한 사람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고 주님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회개하는 사람은 자기를 성찰하고 돌아보며 그리스도 앞에서 겸비한 마음으로 그의 온전하심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 강도는 예수님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최소한의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온전한 낙원을 복으로 주셨습니다. 강도는 부스러기 은총을 구했지만 주님은 오늘 바로 너와 함께 하겠다는 임마누엘의 은혜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십자가의 사랑이 넘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사랑의 본질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말씀 요약·정리 : 허숙 권사(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