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의 종말은 심판이나 저주가 아니라 구원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을 우리가 덧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종말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깨어 있으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깨어있지 못했던 제자들은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가는 영적 실패를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본문에서 종말에 대한 현상을 여러가지 측면에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종말을 대비하는 영적 자세와 종 말의 심판에 대해 열 처녀 비유와 달란트 비유와 양과 염소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들의 공통점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때까지 방심하거나 나태하지 말고 경각심을 가지라고 엄중하게 가르치시면서 이를 ‘깨어 있으라’는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복음서에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마태에 6회 마가에 7회 누가에 2회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도 같은 말씀을 전했는데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살전 5:6),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 전 5:8)라고 말씀했습니다.
1. 왜 주님은 종말에 대하여 말씀하시는가?
종말에 대한 논란은 어둡고 절망적인 시대일수록 더 격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을 세 가지 의미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개인적인 종말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는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둘째는 예루살렘이 몰락하는 민족의 종말을 의미하셨습니다.(마 24:2) 셋째는 우주적 종말로 주님의 재림을 전후로한 대환난과 관련된 종말을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종말을 여러 번 말씀하신 것은 종말이 반드시 올 것이기 때문에 잘 예비할 것을 강조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모든 일은 마지막이 좋아야 합니다. 힘든 세상에서 쉽지 않은 삶을 살고 나름 신앙생활하면서 살았는데 마지막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한 불행이 어디있겠 습니까? 예수님은 그런 사람이 생각보다 많을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하시며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라고 하셨습니다.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9). 세상사에 분주하여 옳고 그름의 구분도 없고 신앙도 양심도 버린 채 살아가다가 홍수 심판에 직면했다는 말씀입니다. 정신없이 분주하게 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죄짓는 일 뿐입니 다. 어떤 사람은 종말이 없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모두에게 종말이 오고 죽음이 오는데 나는 예외일 것처럼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 하니 세상사가 혼란하고 허무하며 단지 세상의 더 자극적인 쾌락만 찾게 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단지 죽음만 확실하다"라고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종말을 모든 것이 파괴되고 무로 돌아가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종말은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것으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지나 영광의 하나님 나라에 이르고 이 세상의 종말이 오면 새 하늘 새 땅이 우리를 기다립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의 종말은 심판이나 저주가 아니라 구원의 완성이며 하나님의 축복과 영광을 우리가 덧 입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종말의 영광에 참여하기 위하여 ‘깨어 있으라’고 가르칩니다.
2. 깨어 있음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종말을 준비하고 대비하라고 하시며 세 가지 비유로 가르치십니다. 첫 번째 열 처녀 비유는 주님의 날을 예비하는 삶의 지혜로움에 대하여, 두 번째 달란트 비유는 맡겨 주신 일에 대한 성실한 충성에 대하여, 세 번째 양과 염소의 비유는 주변의 연약한 자들을 돌아보는 신앙의 진정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세 가지 기준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은 예수님께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는 대답을 들어야 했고, 그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겨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연약한 자를 무시하고 살았던 위선자들에 대하여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마 25:41)고 하셨습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13절). 문제의 핵심은 깨어 있지 못하는 것입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신앙은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열 처녀 비유에서 신랑이 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을, 열 처녀들은 신자들을, 잠든 것은 영적 나태를, 기름이 준비되지 못한 것은 성령 충만치 못한 육적인 신앙생활을 의미합니 다. 특히 이 부분은 우리의 영적 실패가 깨어 있 지 못함과 성령 충만치 못함에 있음을 지적합니 다. 그렇다면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 는 것입니까? 1) 기도하라는 의미입니다. 2) 예민한 영적 경각심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영적으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고 취할 것과 버릴 것, 가까이할 것과 멀리해야 할 일들을 구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탄의 역사에는 속임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3) 깨어 있음은 언제나 준비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준비하는 사람입니다.
3. 결론적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열 처녀 비유에서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부족했던 것은 기름이었습니다. 혹 다른 부분이 부족했다고 해도 기름이 충분했다면 충분히 대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신앙인에게 지식이 다소 부족하고 인생 역량이 충분하지 못해도 신앙을 유지하고 천국 가는 일에 근본 장애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없으면 지속적으로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이 말씀하실 당시의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신 긴박한 상황에서 돌연 겟세마네로 가셔서 마지막 밤을 통절한 기도로 보내십니다. 주님께서도 이 사명의 마지막 고비를 넘어가시기 위해서는 홀로는 감당하실 수 없는 어려움을 직감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하셨습니다. 흔들리지 않을 의지와 고통을 극복할 능력과 그 과정에서 누구도 저주하 시지 않고 끝까지 온 인류의 죄짐을 대신 지실 메시아의 위엄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누구도 도와드릴 수 없는 일임을 아시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밤을 새워 피땀 흘리시며 기도하십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친구에게 기름을 나눠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영적 삶의 근본 동력은 사람에게서 빌리거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나 능력은 사람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다른 사람의 은사를 내가 빌릴 수도 없는 것입니다.
종말은 반드시 있습니다. 개인적인 종말도 있고 주님 다시 오시는 온 세상의 종말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종말은 모든 것의 끝이 아니라 더 영광스러운 삶으로 승화되는 영광과 은혜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의 마지막에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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