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에 실려 있는 몇 편의 저주 시 중 그 강도가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진 시편109편은 성경학자들의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시 중 하나이다. 원수에 대한 저주의 잔인성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에 배치된다는 이유 때문이다. ‘원수로 하여금 단명하게 하시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자녀는 고아가 되어 힘없이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신세가 되게 해 달라’고 빌고 있다.(8-10)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다.(눅 6:27-28)
구약에서 경건은 의분과 병행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난다. 저주의 시를 쓴 다윗의 원수는 사적인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원수라는 해석이 있다. 전술한 시인의 간청은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예언적 선언이라 한다. 따라서 저주는 개인감정이나 실수로 생긴 것이 아니다. 따라서 다윗은 설욕과 판단은 하나님 손에 맡기고 있다. 자신의 손으로 보복하지 않고 오래 참는 자비로, 자기를 죽이려 한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의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고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내가 해하지 아니하리니’(삼상 24:10) 하면서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롬 12:19)라는 말씀인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성도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만 달란트 빚진 나는 용서를 받아야 한다. 이 일에 실패자가 되면 그리고 타인에게 해를 끼치게 되면 그들에겐 형벌이 있다. 악행한 자는 상이 아닌 심판을 받아야 한다. 가증되고 감상적인 세대에서 우리는 공개적으로 남을 저주하는 말을 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악한 자가 자기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돌아오는 시대에 아직 우리는 살고 있지만 본시에서 기술한 심판은 결국, 하나님께 대적한 악한 자에게 임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장이 되실 때 그들은 최후 심판석에 서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죄를 신중하게 다루시고 계시며, 은혜 받을 만한 때에 그들이 은혜를 받도록 강권하시는 자를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본시는 일깨워 주고 있다. 원수들의 행악은 시인으로서는 감내키가 어려웠다. 근거도 없는 사실을 있는 사실처럼 조작하여 유포하므로 중상 모략하는가 하면, 이유도 없이 무고한 사람을 미워하여 헐뜯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자들이었다. 이런 행악자에 대하여 성도는 미워하기 쉽고 저주하기 쉬우련만, 시인은 ‘기도할뿐이다’(4)라 한다. 원수는 험담이나 중상키 위한 유언비어로 나를 해하려 했지만 나는 하나님께 말할 뿐이라 한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7) 하나님의 섭리의 빛 속에서 모든 것을 보는 이가 할 수 있는 고백이다. 대적자의 대적자가 법정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7) 법정의 피고인 옆에는 변호인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 악인이 있을 뿐아니라 사탄이 서서 그를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악인을 오히려 대적한다. 악인은 ‘아버지로부터 삼사대까지 죄를 갚겠다’(출 20:5-6, 눅 19:41) 그러므로 죄를 대수롭게 여기는 자, 회개치 않는 자는 죄에 상응하는 벌을 그 후손들까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은 자기 명성에 상처를 주고 공격한 원수보다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하여 더 큰 관심과 생각을 하면서 자신의 명예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더 소중히 여기고 있다. 악인은 그들의 입을 가지고 다윗을 저주하였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자기를 방어,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기도한다. 악인의 오른쪽엔 사탄이 서 있으나 궁핍한 자의 오른편엔 하나님이 계시어 보호, 구원해 주시고, 선악 간에 심판하실 것이다. 원수의 저주를 증가할 주의 은복을 믿고 원수의 도전을 받는 것보다 성도답게 나는 대응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자.
이종윤 목사 <한국기독교학술원장ㆍ몽골울란바타르대 명예총장ㆍ서울교회 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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