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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3
서울교회, 주님께 칭찬받는 교회 되는 것이 가장 큰 소망
가정과 사업보다 하나님의 일 최우선순위 60여 년간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주일성수

오정수 장로·이영희 권사 (서울교회)

서울 근교에 위치한 오정수 장로 자택을 방문한 사람은 누구나 부러움과 존경의 감탄사를 쏟아내게 된다. 전자는 유유히 흐르는 한강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너른 잔디밭을 가진 집의 아름다움 때문이고 후자는 집안에까지 예배당을 만들어놓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집을 가리켜 ‘베델하우스’라고 명명할 정도의 그 신실한 신앙심 때문이다.

‘베델하우스’라고 새겨진 대문을 지나면 어른도 맘껏 뛸 수 있는 푸른 잔디밭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잔디밭을 가로지르면 담장 너머 강을 끼고 있는 한적한 산책로가 펼쳐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서 살면 근심 걱정은 저 강물에 던져버리고 자연과 벗하며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마치 그 옛날 아담과 하와처럼.

“야곱이 ‘베델’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제단을 쌓았듯이, 이곳 ‘베델하우스’를 찾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집을 ‘베델하우스’라 이름 지은 까닭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집에서 쉼을 얻고 함께 교제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베델하우스에는 일 년에 2천 명가량의 손님이 찾아온다.

가장 사적인 공간이 되어야 할 집도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으로 쓰임받고자 한다는 오 장로는, 매사에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식하며 철저한 신앙생활을 해 왔다. 그에게 있어 교회 일은 언제나 사업, 가정을 제치고 가장 우선순위가 되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사는 것은 잠깐이다, 언제 나를 불러 가실지 모르니까 내일로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하자’고 생각하며 교회 일을 우선순위에 두고 일해 왔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런 나에게 큰 복을 주세요. 하지만 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 일을 한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거든요. 주시고 안 주시는 건 하나님 마음이지, 주실 것을 기대하고 일하지는 않았어요. 효도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래서 부모가 무엇을 주시든 설사 주시지 않든 그것은 부모 마음이잖아요.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것만으로도 우리 기쁨이 되는 거고요.”

서울교회(이종윤 목사) 건축 당시 오 장로는 사실상 사업은 포기했었다. 건축위원장을 맡고 있던 그는 오히려 사업장에는 나가지 않고 공사 시작 날부터 완공 때까지 건축공사현장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했다.

“교회가 나날이 성장해 예배당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재정은 없었고 IMF 금융위기까지 겹쳐 건축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다들 어렵다고 할 때, 모두가 할 수 없다고 할 때, 하나님의 역사로 교회가 건축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목사님께서는 물질이 아닌 비전으로 교회를 짓자고 하셨죠. 놀라운 것은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서 정말 건축이 이뤄졌고 헌당을 하고, 더욱이 제 사업도 번창한 겁니다.”

오 장로가 운영하던 영광전자는 타 대리점 200~300곳에 해당하는 매출을 올렸다. 사회적 경제난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산하고 사업운영에 어려움을 겪었던 당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판매실적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업계에서 선두주자로, 신뢰할 만한 회사로 인정받고 있다.

오 장로는 그의 철저한 신앙의 근원이 어린 시절 주일학교 교사들로부터 받은 교육에서 온 것이라 했다.

1946년 평안남도 평원군, 부유한 가정에서 2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가족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자랐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로 온 가족과 함께 피난 내려오게 됐고, 1951년 크리스마스 때 누나를 따라 생애 처음 교회를 찾게 됐다. 이후 지금까지 60여 년이 지나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주일을 거른 적이 없다.

“어릴 적에는 고신 교단 교회에서 엄격하게 신앙훈련을 받았어요. 그때 주일학교 선생님들께서 우리를 철저하게 교육시켰지요.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다, 주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고 하셨던 그 말씀들이 지금까지 마음에 새겨져 있어요. 그때부터 생명을 바쳐서라도 주일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요.”

어린 시절 짓궂은 개구쟁이였지만 기도하는 시간에는 절대로 눈을 떠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축도하시는 목사님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성탄절 연극을 하기 위해 강대상에 오르기 전 자신의 깨끗하지 않은 몸이 거룩한 전을 더럽힐까 두려워 ‘살아서 내려오게 해 달라’고 기도했던 순진한 믿음 또한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최근 예배드리는 내 모습이 나태해진 것 같아 주일 헌금 액수를 대폭 올렸어요. 아까운 생각이 들 정도로요.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고 하잖아요. 선교하거나 어디 기부를 할 때에는 기명으로 하기 때문에 내가 얼마 했는지 드러나지만 주일헌금은 하나님과 나만 아는 것이니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드릴 수 있지요.”

오 장로는 소문난 애처가이다. 평소에도 ‘사랑한다’ ‘예쁘다’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는 등의 애정표현들을 기회가 있는 대로 한다고 하니 흔치 않은 모습이다.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 벽에는 신혼 시절 오 장로가 이영희 권사를 등에 업고 돌 징검다리를 건너는 흑백사진이 걸려 있다. 서로를 바라보는 애정어린 눈빛은 사진 속 수십 년 전 그때와 지금과 변함이 없다.

이 권사는 오 장로를 가리켜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온유한 성품의 사람이다”며 “남들은 모르는 저만 아는 모습마저도 존경스럽기 때문에 자연히 순종하고 싶고 함께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또 한 가지, 오 장로가 아내 못지않게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교회이다. 사람들은 그의 번창하는 사업을 가리켜 ‘복 받았다’고들 하지만 그는 “서울교회와 같은 좋은 교회에서 주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큰 복”이라고 했다. 한때 교단을 이적하는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사랑하는 교회와 존경하는 목사님과 끝까지 함께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과정에 믿음은 더욱 단단해졌다.

“많은 교회 중 한 교회가 아니라 다른 교회를 섬기는 교회가 될 것”을 소망하며 진행하고 있는 목회자 세미나와 김치신학 세미나는 이미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술행사가 되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해야 하잖아요. 우리에게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데 유익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중요하죠. 유익하다면 혼신의 힘을 다해야 하고,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죠. 그래서 세미나를 시작하게 됐고 김치신학세미나에는 그동안 150여 국가가 거쳐갔어요. 구제사역의 일환으로 설립된 아가페타운에는 정신발달장애자들을 위한 호산나 학교가 세워졌어요. 곧 노인복지를 위한 실버타운도 지을 계획입니다.”

오 장로는 앞으로 서울교회가 더욱 견고히 뿌리내려 다른 많은 교회들을 돕는 충성스러운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은퇴하는 날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일할 것이라고 했다.

훗날 계시록의 일곱 교회와 같이 서울교회가 칭찬받는 교회가 되는 것이 그의 가장 큰 소망이고도 덧붙였다.

/한지은 기자

한국장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