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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말씀의 샘 > 강해/제자의 도 > 요한 칼빈의 기독교강요 강해
2010-11-16
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
로마서 6:1-11
 

본문 : 로마서 6:1-11

제14강 칭의와 그리스도와의 연합(3.11-18)
(롬6:1-11)

1.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이중은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인애로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믿음으로 우리가 붙잡고 소유하는 것이다. 그에게 동참함으로 우리는 대체로 이중은혜를 받는다. 즉 그리스도의 무흠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함으로 우리는 하늘에서 재판장 대신에 은혜로우신 아버지를 갖게 되는 것이며 둘째는 성령으로 성화되어 우리는 흠 없고 순결한 삶을 힘써하게 되는 것이다.(3.11.1)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두 강조점이 있다. 첫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그리스도 곧 그의 위격(person)에 대한 강조이다. 그리스도가 가져다주는 구원의 유익은 그의 위격과는 별개의 믿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이 믿음으로 붙잡고 소유한 대로만 받는 것이다. 여기서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보이는데 이것은 칼빈이 칭의를 설명할 때 강조적, 반복적으로 듣는 바이다. 둘째, 이 연합 즉 그의 몸에 참예함으로 신자들은 우선적으로 또는 무엇보다도(above all) 이중은혜(a double grace)를 받는다. 이것은 칭의와 중생(성화)이며, 칭의는 화해하지 못한 하늘의 재판관 대신에 은혜롭고 인애하신 아버지를 갖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주는 모든 다른 구원의 유익을 포함한다.
칼빈이 그리스도와의 연합, 칭의, 성화의 삼각구도를 속량(redemption)의 적용에 관한 구도를 결정하는 준거점으로 삼았다. 칼빈이 말한 속량의 적용이란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완성된 구원을 개인적으로 받아드리는 것을 말한다.

이중은혜가 연합에 근거를 두고 그것으로부터 흘러나온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행한다. 그것은 그에게 참예함으로(by partaking of him) 받는 것이다. 또한 연합의 이중 유익으로서 칭의와 성화는 불가분리라는 것이다. 두 개의 은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단수로 이중은혜를 말한다.
믿음에는 선행이 빠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칼빈은 칭의 이전에 상당히 길게 성화를 논의했다고 말한다. 먼저 칭의를 논하기 전에 구원하는 믿음의 성격을 분명히 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것이다. 당시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끊임없는 비난이 개혁교회의 칭의 교리 즉 은혜로 전가된 의롭다 함을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는 칭의 교리는 영적으로 나태해지고 거룩한 생활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칼빈은 믿음의 본질 특히 그 내재적인 성격과 거룩에 대한 관심을 길게 논함으로(133쪽 분량) 효과적으로 반격한다. 이 자료는 칭의의 문제와(분리가 아니라) 구별되며 그것을 논하는데 우선한다. 칼빈은 믿음이 거룩을 지향하는 성질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로마 카톨릭의 비난을 부숴버렸다. 칭의를 받은 신자들의 삶에서 현재 진행 중인 그리고 항상 나타나는 경건에 대한 관심은 분명 칭의 다음에 오나 그것은 단순히 칭의의 결과는 아니다. 칼빈은 성화를 칭의 앞에 길게 설명했는데 그것은 칭의와 성화가 구별되지만 동시에 그리고 분리할 수 없게 믿음으로 말미암는 까닭에 그것들이 나타나는 순서를 분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만으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것은 선행의 결여가 아니다. 성화하는 믿음 곧 거룩한 삶을 작동하게 하는 믿음은 의롭게 하는 그 믿음이다. 물론 믿음이 성화하게 하거나 성화를 작동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이 의롭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의롭게 하는 믿음과 거룩하게 하는 믿음은 다른 것이 아니며 서로 다르게 작용하는 것도 아니다.
칼빈에게 성화는 일생동안 진행되는 과정으로 칭의를 뒤따르며, 칭의는 성화에 우선하며 신자의 선행은 의롭다함을 받은 자의 열매요 표지다. 이미 의롭다함을 받은 자만 성화가 진행된다. 이것은 칭의가 성화의 근원이거나 칭의가 성화를 유발한다고 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그 근원과 원인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그와 연합되는 순간에 죄인들은 이중의 은혜를 받으며 지금 또한 확정적으로 의롭게 되는 때에 성화가 시작되어 현재 진행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칼빈에 의하면 칭의가 종교의 흥망이 달려 있는 것이라 한다. 종교를 지탱하는 중심점이라는 뜻이다. 신자의 확정된 하나님과의 호의적인 법정적 관계와 그 관계에 대한 지식인 칭의 없이는 구원과 경건의 기반이 결여된 것이라 한다.
그러나 구원을 소유하는데 있어서 칭의는 필수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칭의는 구원의 유일한 기반으로 생각해서도 안 되고 가장 주된 조항이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기반으로서의 칭의는 성화와 더불어 신자들 속에 있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중요한 이중은혜의 한 요소다. 중심점으로서의 중요성을 감소시킴 없이 칭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안에 확실히 근거하고 있다.

칼빈은 3권1장1절의 서언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 밖에 계시고 우리가 그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한 그가 인간구원을 위하여 고난당하시고 행한 모든 것이 우리에게 무용하며 무가치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이것을 긍정문체로 표현하면 우리는 그와 더불어 한 몸이 되었다.(in unum)이다. 그리스도와 신자들 사이의 연합을 보여주고 강조한다. 구원의 적용에 있어서 이 연합이 중심이고 최고점임으로 그것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무용하고 무가치하다고 했다. 그는 이 연합이 믿음으로 얻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밝힌다. 믿음은 성령이 주권적으로 그리고 효과적으로 하시는 사역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하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옷 입는 믿음(갈3:27), 복음 안에서 계시되는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믿음은 우리 쪽에서 볼 때 연합의 띠(bond)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 자신과 함께 효과적으로 연합하게 하는 띠이다. 성령이 역사하는 믿음에 의한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 그리고 신비적인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와의 연합 때문에 칭의는 믿음(만)으로 말미암으며 연합은 믿음과 함께 칭의를 가져오는 것이다.
우리는 칭의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그의 은총 가운데로 영접해 주시는 것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있다고 말한다. 법정적인 면을 강조하여 그러므로 의롭다 하다(to justify)는 것은 마치 그의 무죄가 확정된 것처럼 피소자를 석방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인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교통하여 그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해하며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죄의 용서를 획득하며, 그리스도의 의를 마치 자기 것인 것처럼 옷 입고서 하늘의 심판대 앞에 당당히 서는 것이다. 이 정의와 설명조의 문장에서 우리는 연합과 칭의의 관계를 더 탐구할 수 있을 것이다.(3.11.2-4)


2. 연합, 전가 그리고 칭의

칼빈은 되풀이해서 의가 신자들에게 전가 되었다고 말한다.(3.11.2) 이 두 개념 즉 간주됨과 전가됨은 의미가 가깝고 중복되지만 단순한 동의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칭의하기 위한 행동은 의의 전가를 통하여…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신들 안에 의로움이 없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이다.
전가는 간주됨에 선행한다. 의의 전가 즉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는 의의 간주, 곧 의롭다고 간주하는 직접적인 근거이거나 기초이다. 칼빈에게 있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전가의 선행조건이다. 전가는 칭의에 포함되며 그 연합과 함께 주어진다. 칼빈에게 그리스도에게 참여는 전가에 선행하며 전가는 심판에 선행한다. 우리의 의는 우리 안에 있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은 칼빈의 칭의론의 핵심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머리와 지체의 연합, 우리 마음에 그리스도의 내주하심, 그가 부여하신 선물을 그와 더불어 나누는 것, 그리스도를 옷 입고 그의 몸에 접붙이는 것, 그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은 신비한 연합이며 영적 결속이다.
칼빈은 칭의를 오로지 그리스도의 법정적으로 전가된 의에만 기초하며, 그것을 오로지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칭의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이해는 신자들의 그리스도와의 근원적인 연합과 그에 대한 적절한 이해와 더불어 그 생사를 함께 한다.

이종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