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롬8:9-11, 살후2:13-15
제15강 구원을 누림 : 성령, 믿음과 확신, 회개(Ⅰ)(3.1-3, 6-10)
(롬8:9-11, 살후2:13-15)
기독교강요 3권의 제목은 매혹적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 : 어떤 유익이 우리에게 오며 어떤 결과가 따르는가? 이 3권의 첫 세장을 통하여 칼빈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개인적으로 누리게 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주고 있다. 주관적이고 경험적인 구원의 문제에 대해 칼빈은 3가지 주제를 논함으로 답을 제공해 준다. 첫째, 우리는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는 끈으로서의 성령(3.1) 둘째, 믿음과 확신의 성질(3.2), 셋째, 회개의 교리(3.3)인데 순서대로 살펴보자.
1.성령(3.1)
칼빈은 신학적 지식과 실천적 경건 또한 진리와 그것의 유용성이란 두 명제를 분리시킬 수 없었다. 신학이란 우선적으로 지식 즉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관한 지식의 문제를 다룬다. 하지만 참된 경건이 없는 곳에는 참된 지식도 없다. 칼빈이 생각하는 경건(pietas)의 개념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뿌리를 박고 있으며 동시에 그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고자 하는 인간의 태도와 행동이 이 개념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인간이 갖는 바른 태도란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부터의 예배, 그 분에 대한 구원의 믿음(saving faith, 구원과 관계되는 믿음), 자녀로서 갖는 두려움, 기도에서 우러나오는 순종, 그리고 경외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섞인 경외심(reverence)을 칼빈은 경건이라 부르는데 이러한 경외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유익한 축복을 깨달을 때 오는 것이다.(3.2.14)
칼빈은 그리스도인 삶 전체가 일종의 경건의 실천이어야 한다고 했다.(3.19.2) 경건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이는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의 목적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은 하나님의 속성 안에 밝히 빛나고 있는 그 분의 영광을 인지하고 이를 반영하는 삶이다. 하나님의 속성은 이 세계 구조 속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및 부활을 통해 드러나 있다.(3.2.1)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개인의 구원을 대신할 만큼 더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이 목표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곳에서만 성취될 수 있다. 이 신비적 연합 속에서 주께서는 그들이 살든지 죽든지 그 분의 것이라고 주장하신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성령의 능력에 의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된다.
칼빈에게 경건이란 신자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뿌리를 박고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바로 이해하고자 할 때 우리는 이 연합(union)의 주제를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오는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의 제반 요소들 - 칭의, 성화, 견인등 - 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이는 아예 일어날 수 없는 것인데 이 연합은 성령께서 우리의 믿음을 통해 이루어 내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성(human nature)을 취하시고 그 인성을 그 분의 선(善)으로 채우셨기에 이러한 연합이 가능하게 되었다.
우리가 인성을 가지고 계시는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했을 때 이 연합은 역사적이고 윤리적이고 인격적인 성격의 것이지 실제적인 연합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인성과 우리의 인성간에 인성적 본체의 조잡한 혼합(crassa mixtura)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흡수되거나 그 분과 하나 되어 우리 자신의 인격이 약간이라도 소멸되거나 하는 그런 식의 연합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은 이 같이 기술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끊을 수 없는 교제의 끈으로 우리와 꼭 붙어 계실 뿐아니라 놀라운 영적 교통에 의해서 날이 갈수록 더욱 더 우리와 한 몸이 되시며 드디어 완전한 일체가 되신다’(3.2.24) 경건한 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본성 속에 존재하게 된 그리스도의 완전이라는 샘으로부터 성화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믿음을 통해 길어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칼빈의 실천 신학과 경건은 그리스도와의 교통(communio)을 통해서 고동치고 있다. 이 교통이라는 개념은 그리스도의 유익(benefit)에 참여함(participatio)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 유익은 그 분과의 연합과 불가분리의 것이다.
그리스도와 연합과 교통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믿음을 통해서만 실현된다. 이것은 실제적 연합이요 교통이다. 그러나 실제적 연합이라 함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본성의 실체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께서 신자들을 그리스도와 너무도 밀접하게 연합시키심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그 분의 살중의 살이요 뼈중의 뼈처럼 되게 하신다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엡5:30)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만들어 내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외적 육체적 연합보다는 더 밀접한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하나 되신다함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생활하고자 하신다는 의미다.
우리의 영과 몸이 그리스도와 철저하고 전체적인 연합이 정점에 도달하여 충만히 구현되는 시점은 심판날 우리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때가 될 것이다.(고전6:15 주해)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함께 일하신다. 두 분은 서로 구별은 되나 분리될 수는 없다. 칼빈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라는 표현에서 금방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으로 옮겨가곤 한다.(3.2.39) 그리스도는 성령의 유일한 담지자요 수여자시다. 성령의 모든 행위는 본질상 그리스도의 행위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구원에 속하는 어떤 것도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법이 없고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에 속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내려 주시는 법이 없다.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구원의 일을 이루시고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죄인의 마음속에 구원을 이루신다.(3.1.1)
오직 성령만이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를 이 땅위의 신자와 연합시킬 수 있다. 성령께서 성육신을 통해 하늘과 땅을 연합시켰듯이 또한 성령께서는 중생이라는 사역을 통해서 택함 받은 자를 땅에서 일으켜 하늘의 그리스도와 교통하게 하시고 또한 그리스도를 이 땅위 택자의 마음과 삶 속으로 모셔 오시는 것이다.(14.17.6) 그리스도와의 교통은 언제나 성령의 사역의 결과이며, 이 사역은 온전히 이해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엡5:32 주해) 그래서 성령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묶는 고리가 되고 또한 신자에게 그리스도가 전달되는 통로가 되신다.(3.1.1)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성령은 그리스도와 신자를 묶어 주는 끈이 되신다. 반면 우리의 시각에서 볼 때는 우리의 믿음이 그 끈이 된다. 성령의 주된 사역이 죄인 안에 믿음을 일으켜 내는 것이므로 이 두 가지 관점은 상충되지 않는다. 믿음 그 자체의 원천은 오직 성령뿐이다.(3.1.4) 그러므로 이 일에 인간이 주도권을 가지고 먼저 시작할 수 없다. 믿음은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초자연적 선물이다.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창조해 내시는 성령의 사역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지식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믿음을 창조해 내는 성령의 사역에 의해서만 우리는 참으로 구속주를 아는 지식에 이를 수가 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시고 그리스도의 유익을 자유롭게 누리게 해 주신다. 믿음의 가치는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그리스도가 없이 믿음 자체만으로는 고결함과 가치도 지닐 수 없다. 믿음은 오직 도구적 역할만 하는 것이다.(3.11.7) 그러나 그 믿음이 그리스도에게 고정될 경우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육신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넘어 하나님이신 그 분을 볼 수 있게 되고 모든 하늘 위를 뚫고 들어가 천사들을 목도하면서 경모(adore)하는 신비스런 대상들에 까지 이를 수 있게 된다.(요12:45, 8:19 주해) 성령께서는 믿음을 사용하셔서 그리스도의 천상적 은혜들을 인간의 영혼 안으로 끌어 내리기도 하시고 우리 영혼이 하늘 위로 끌어 올려지도록 하기도 하신다. 믿음에 의해 우리는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3.2.1)
2.믿음과 확신의 성질(3.2)
①믿음의 정의와 설명
믿음은 단지 하나의 찬동(assensus)이 아니다. 믿음에는 지식(cognitio)과 신뢰(fiducia) 두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 이 두 요소는 개념적인 문제라기보다 신앙 생 활의 구원적 차원에 해당된다. 믿음이란 역사적 지식에 구원적 찬동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분명한 지식(certain knowledge)이 구원적이고 확실한 신뢰(a saving & assured trust)와 결합된 것이다.(3.2.14)
칼빈은 믿음이 지식을 토대로 하고 있음을 견지한다.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즉 넓게는 성경 그리고 좁게는 복음에 근거하고 있다.(2.9.2) 믿음의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이다. 그것은 언제나 성경 말씀에 대해 아멘이라고 말한다.(요3:33 주해) 그러므로 확신은 말씀 안에서 추구되어야 하며 또한 이 말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마8:13, 요4:22 주해) 태양광선이 태양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 럼 확신은 말씀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칼빈은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약속들을 확신의 근거로 삼는다. 그 이유는 이 약속들이 거짓말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성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비참 가운데 있는 죄인들에게 자비를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믿음은 바로 그 약속에 기댄다.(3.2.29, 41) 이 악속은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그 분의 약속을 향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그리스도와 약속이 동의어인양 말이다.(3.2.32)
믿음은 약속에 근거한다는 특징을 지니므로 믿음 위에는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의 도장이 찍혀있다. 따라서 믿음은 그 본질상 이미 확신이 포함되고 있다. 확신, 확실성, 신뢰 이런 것들이 믿음의 본질이다. 확실하고 확신을 주는 믿음은 택함 받은자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받아드리도록 그들에게 믿음을 주신다.(3.2.16)
하나님 자신이 그 분의 진실하심과 신실하심 속에서 선택자들의 보증이 되신다. 따라서 확신의 근거는 하나님 자신이다.(롬8:16, 벧전1:4, 히4:10 주해) 칼빈도 믿음에 대한 공식적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린다. :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심(benevolence)을 아는 견고하고도 분명한 지식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이라는 진리에 근거하고 있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쳐지는 것이다.(3.2.7) 믿음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이며 한 전인(全人)속에서 일어나는 일로서 지성(mind)을 사용하고 마음(heart)에 적용되며 의지적 항복이 수반되는 것이라는 점이다.(3.2.8) 확신은 믿음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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