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전 15:12-19
제24강 종말론 :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
(고전15:12-19, 요12:20-26)
3권25장의 제목이 보여주듯이 최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두 전통적 주제를 설명해보자. 그러나 25장은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①최후 부활에 대한 기독교 교리에 대한 확인이다. ②부활 교리에 대한 반대의견에 대한 반박이다. ③영화의 최종적 상태의 성질에 대한 논술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생명에 대한 부활의 소망의 중요성을 언급함으로 부활이란 주제를 취급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충만한 구속에 대한 신자들의 기대는 이 세상에서는 성취되지 않을 것이다.(3.25.1)
내세에 대한 묵상/고찰(meditatio futurae vitae)을 그리스도인의 순례길을 떠 올리게 하는 언어로 묘사하여 칼빈은 복된 부활에 대한 계속적인 묵상에 습관을 들인 사람만이 그 복음에서 충분한 유익을 얻는다고 한다.(3.25.1) 그리스도인의 삶은 소망의 삶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계속적으로 기대한다. 이는 신자 안에서 이미 시작된 그리스도의 사역이 그날에 완성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2.25.2)
1.신자의 몸의 부활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위해 두 가지 근거에 호소한다.
① 신자의 부활에 대한 모형이 된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② 하나님의 능력에 둔다.
그분만이 신자들의 몸을 그리스도와 같이 일으키셔서 영화롭게 할 수 있으시다. 많은 철학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영혼 불멸성을 가르칠 수는 있었으나 육체의 부활은 주장할 수 없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지체들이 머리의 특권들을 누릴 것임으로 그분의 모든 것에 충만히 참여한다는 원리하에 성령은 신자들에게 그분과 연합을 재촉하실 것이라고 확신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세에서 동료로 삼으시려 다시 일어나신다. 그분은 아버지에 의해 일으킴을 받았다. 그 분은 교회의 머리임으로 아버지는 교회로부터 그가 분리 되도록 결코 허용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 일으킴을 받으셨는데 그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도록 촉진시키시는 분이시다.(3.25.3) 그리스도와 연합한 신자가 부활한다는 기대는 자연의 통상적 원리를 벗어나는 것이지만 그것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의 유업을 보장할 수 있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이다.
2.부활교리에 대한 반론들
①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이방문화에서 공통적이며 때로는 하나님의 백성 중(사두개)에서 조차 그렇다. 그러나 고대 매장 풍습에 의해 논박한다. 매장은 모든 사람들의 눈앞에 보여주는 좀 새로운 생명에 대한 일종의 열망이다.(3.25.5) 매장을 위해 시신을 준비하는데 바쳐진 매우 신중한 주의와 관심은 부활과 새 생명의 기대에 대한 일종의 증거이다. 무덤을 가리켜 침소(寢所, cemetary)라 부르는 것이다. 그 잠자는 장소는 부활을 기다리는 일종의 대기실이다.(3.25.8)
②그리스도의 통치를 천년으로 제한한 천년 왕국주의자들의 오류를 칼빈은 또한 강하게 배척했다.(3.25.5) 사도시대부터 교회 역사를 걸쳐서 천년왕국은 있었으며 요한계시록(20장)에 호소해 왔다고 한다.
③사람의 영혼이 몸과 함께 죽으며 마지막 날에 부활한다는 오류와 성도들의 몸이 새롭게 갱신되어 영화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부활의 몸은 근원적으로 새롭다고 주장하는 오류를 크게 비판한다.
불신자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중보의 유익이 아니다. 그것은 심판의 부활이며 하나님 아버지가 모든 육체를 심판할 자로 지명한 분으로서 그리스도의 힘과 의와 대권을 명백히 한다. 이 부활은 (악한 자들을)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으로 끌어낸 부수적 부활이다.(3.25.9)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대부분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지체된 자들에게 마땅히 속하는 하늘의 영화를 가리킨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시키기 위해서 오셨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강조점이다.(3.25.9)
3.영원한 생명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특징은 최종적 상태에 대한 억지 추측의 무익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최종적 상태가 광채, 즐거움, 행복, 영화로 가득할 것이라고 확언한다.(3.25.10) 우리는 신자들이 하나님과 가장 친밀하고 직접적인 친교를 누리리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지고의 축복이며 희열이다. 그러나 칼빈은 강력하게 정신을 차리고 우리의 한계를 잊어버리고 더 담대히 높이 솟아오르지 않도록 하늘의 영광의 밝음에 의해 압도되어야 한다고 독자들에게 주의를 준다. 하나님 말씀의 경계를 넘는 위험한 견해들과 거의 다름없는 바 최종 상태에 대한 많은 중세기 신학자들 사이의 토론들을 간접적으로 비난한다.
모든 신자들의 공통유업이 될 영생의 선물에 더하여 하나님은 그의 종들에게 그분의 이름으로 한 그들의 섬김을 인정하여 여러 가지로 특별한 선물을 나누어 주실 것이다. 영원한 형벌에 대한 교리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확실히 말하되 지옥에 대한 성경의 표현들이 물질적 은유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은유들을 지나치게 확대해서는 안된다. 지옥에 관한 한 우리의 이해의 초점은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로부터 단절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3.25.12)
칼빈은 미래상태 또는 최종적 상태인 영화의 정확한 성격을 추측하면서 성경 계시의 경계를 넘어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말한다.
영혼 수면(soul asleep)이나 필멸론(mortalism) 같은 다른 의견들을 배척한다.
칼빈은 구속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창조 교리의 틀 안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만물이 영원한 아들을 통하여 만들어 졌는데 만물이 구속되는 것도 그 아들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구속이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중보와 그의 성령의 사역을 통한 만물의 본래 질서로서의 회복이다. 그리스도가 창조와 구속의 중보자이기 때문에 칼빈은 그리스도의 초림을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을 실현하는 결정적인 때로 본다.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옛 언약의 약속들은 성취되어지고 만물을 갱신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의 구원 사역의 중요성을 기술하면서 칼빈은 하나님의 포괄적인 목적이 만물을 본래의 질서로 회복시키는 것이라 말한다.(요13:31주해 요12:31주해)
칼빈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전 창조계의 갱신으로 본다. 이 갱신은 인간의 죄와 불순종의 결과를 반전시킨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칼빈의 개념은 전 역사 진행이 그 정해진 목적 즉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위하여 그 타락한 피조물이 갱신되고 영화에 이르게 된다는 종말론적 통찰을 의미한다.
성령의 갱신 사역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것이고 미래에 있을 충만한 성결과 영광의 상태로 신자를 이끈다. 구속의 목표는 신자들이 흠없는 거룩함으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따르는 것이다. 이 목표는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는 않았으나 그 첫 열매는 죄와 죽음의 능력애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함께 나누는 모든 참 신자들의 삶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주권의 신학자 칼빈의 경우 만물은 하나님의 영광에 속하고(of) 영광으로부터 나오고(from)그리고 영광에 이른다.(unto)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계는 갱신되고 인간의 죄와 반역의 모습은 종식된다.
칼빈의 기독교강요 강해를 마치면서
개혁주의 신학의 주춧돌을 놓은 신학자요 종교개혁가, 목사, 저술가, 중재자, 교육가, 사회변혁가와 같은 수많은 타이틀이 말해 주듯이 요한 칼빈은 한시대의 인물이 아니라 천년에 한 사람 나타날 수 있는 거목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장로교회의 신앙과 신학을 세운 칼빈은 한국교회 특히 서울교회와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보여주듯이 제네바교회에 두 번째 부름을 받고 칼빈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님을 돌이켜 생각하여 주님께 제물로 바치듯 내 마음을 즉시 그리고 진심으로 드립니다 라고 한 고백과 그의 신앙표지인 코람데오(Coram Deo)가 우리교회 입구에 걸려있다. 칼빈500주년기념대회를 서울교회에서 2009년도에 열었으며 그 기념으로 우리교회 앞길을 명예도로로 명명하는 칼빈길로 부르기로 하였다. 그 무엇보다 서울교회의 신앙과 신학은 칼빈주의 또는 개혁주의 신앙과 신학을 추구해 왔다. 그의 기독교강요 4권 마지막에 있는 문장 즉 하나님을 찬양하라(Laus Deo)는 우리의 사상이자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가 깊고 넓고 바른 신학을 이해하고 가르쳤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는 믿은대로 산 신행일치의 삶을 산 이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그를 배우고 존경하고 사랑한다.
2010년 11월 1일부터 27일까지 새벽마다 구름떼같이 원근각처에서 몰려와 칼빈의 기독교강요 강해를 들은 여러분께 바른신앙 바른신학 바른생활의 열매가 자자손손 만대에 맺어지기를 기도한다.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이 강의를 들은 여러분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한다. Soli Deo Gloria!
칼빈의 기독교강요(불어,영어,한국어판)
1. Jean Calvin, Institution de la religion Chrtienne, Kerygma Excelsis, 2009 (trans.by Paul Wells)
2. John Calvi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1.2.,Westminster John Knox press, Louisville London, 1960, 2006 (trans. by Ford Lewis Battles)
3. 요한칼빈, 기독교강요 (초판, F.L. Battles 영역 번역), 2008, 크리스찬 다이제스트(번역;양낙흥)
4. 요한칼빈, 기독교강요 (1536년 초판 라틴어판), 2009 생명의말씀사 (번역:문병호)
5. 요한칼빈, 기독교강요 4권, 로고스출판사, 1987 (번역; 로고스출판사)
6. 죤칼빈, 기독교강요, 1988, 생명의말씀사 (번역:김종흡, 신복윤, 이종성, 한철하 공역)
7. 요한칼빈, 기독교강요 6권, 2006, 기독교문사 (번역:고영민)
8. 요한칼빈, 기독교강요, 2000, 한국출판사 (번역:김충호)
9. 요한칼빈, 기독교강요 상중하 (최종판 5판, 세계기독교고전영문번역), 2003 크리스찬 다이제스트 (번역:원광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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