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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말씀의 샘 > 강해/제자의 도 > 요한 칼빈의 기독교강요 강해
2010-11-10
언약의 중보자 I
고린도전서 15:44-47
 

본문 : 고린도전서 15:44-47

제9강 언약의 중보자(Ⅰ)
(고전15:44-47)

모든 인류는 아담 안에서 멸망했고 또한 인간 타락 이후 - 중보자를 통하지 않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구원에 이르는 능력을 소유하지 않았음을(2.6.1) 확립한 칼빈은 이제 칼빈의 기독론의 중심이라고 불리는 주제 즉 그리스도의 중보직분을 다룬다.
중보자는 구약에서 그림자와 모형들을 통해 알려졌다. 새 언약의 온전한 계시는 옛 언약의 경영에서 예언적으로 나타난 중보자의 역할을 폄하하지 않는다. 모든 조상들과 맺은 언약은 본질과 실제에 있어 우리의 언약과 같이 그들은 실제로 하나의 동일한 언약이다. 그들은 언약의 경영방법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2.10.2) 은혜언약에는 하나의 중보자만 있다.(2.11.11) 중보자와 관계없이 하나님은 옛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셨다.(2.6.2) 중보자의 오심이외에 희망 없는 상태에 대한 다른 치료도 없고 교회를 해방시키는 다른 방법도 없다.(2.6.4) 중보자가 없다면 하나님은 인류를 향해 호의를 가질 수가 없다.(2.6.2)

1. 성육신의 필요성
칼빈은 속죄가 단순하거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진술함으로써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 오히려 속죄의 필요성은 신적 작정에서 기인한다.(2.11.1) 이것은 하나님이 마음만 먹으셨다면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요15:13)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 얼마나 깊은 염려를 하셨는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인류구원을 위해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분의 자유의지를 제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자기모순의 상황에서만 제한한다. 그 분은 자신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을 제외한 모든 가능성을 실현할 수 있다.

2. 존재론적 중보직
인간이 더러움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해도 인간 실존은 중보자 없이 하나님께 도달하기에는 너무 천한 것이었다.(2.12.1) 인간에게 중보자가 필요한 것은 그의 피조성 때문이다. 욥4:18을 타락하지 않은 천사들도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중보자가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하면서 욥기에서 율법 준수보다 더 상위의 의를 말한다고 한다.(3.12.1; 3.17.9) 칼빈의 율법을 넘어서는 의는 불가해(불가지)의 영역에 속한다.

3. 아들 삼으심과 하나님의 아버지됨
왜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나? 칼빈은 아타나시우스의 것을 사용한다. 그에게 속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우리에게 속한 것을 대신 취하기 위해 또한 본래 그에게 속한 것을 은혜로 우리의 것으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지 않았다면 누가 이것을 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것을 취하신다. 우리의 살로부터 살을 우리의 뼈로부터 뼈를 취하신다. 그래서 그 분은 우리와 하나가 되시어 우리에게 그분의 것을 부여하신다.(2.12.2) 아타나시우스의 말에 주의를 기우리자. ‘우리가 신이 되도록 그 분은 인간이 되셨다.’ 중보자는 살과 피를 입으시어 인간의 자녀들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다. 칼빈에게 중보자의 나타남은 옛 언약이 얻어 줄 수 없었던 것 즉 우리의 하늘 아버지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4. 아담 - 그리스도 비교
성육신으로 인간과 하나가 된 중보자는 어떻게 장벽을 제거하고 화해를 가져올까? 칼빈의 대답은 바울이 사용한 첫 번째, 두 번째 아담의 교리를 사용한다. 우리 주님은 참 사람으로 나셨고 아담의 이름과 인격을 취하셨다. 이는 아담을 대신해 아버지께 순종함으로써 자신의 육체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만족시키는 댓가로 지불하셨다. 또한 같은 육체로 그 분은 우리가 받아야 마땅한 형벌을 치르셨다.(2.12.3)
대속(아담이 이루지 못하고 우리는 이룰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가 대신 이루심)과 배상(멸죄의 행위로 중보자가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를 달램)이라는 Anselm의 용어를 이용해(2.12.3) 칼빈은 중보자가(죄의 형벌을 치르며 죽기 위해) 인간이어야 하며(승리를 담보하기 위해) 신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로마서5:17을 주석하면서 그리스도가 아담보다 우월하기 때문에 아담의 죄는 그리스도의 의로 극복된다. 아담의 저주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없어지고 그리스도가 부여하는 삶은 아담으로부터 온 사망을 집어 삼킨다.

Ⅰ. 정통적 기독론

13장은 기독론적 이단들을 배경으로 쓰여 졌지만 칼세돈의 기독론을 확인해 준다.

1. 인간 육체의 참된 실체를 입으신 그리스도
1권의 삼위일체적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확립한 칼빈은 이제 그리스도의 참된 인성을 주장한다. 마니교신학의 이원론은 육체를 불완전한 것으로 간주하고, 가현설(그리스도의 육체는 환상적인 것으로 공기로 된 몸이라고 주장 2.13.2)을 주장하는 말시온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필요성과 실재를 부정했다. 그러나 칼빈이 실제 겨냥하고 있는 논적은 화란의 재세례파 운동 창시자인 Menno Simons다. 그는 그리스도가 마리아의 육체에 참여함 없이 성육신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스도는 천상의 인간이었으며 마리아(즉 인간들)안에 있을 뿐이지 마리아(인간들)에 속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만약 예수가 마리아의 육체에 참여했다면 어떻게 마리아의 타락성에는 참여하지 않게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했다. 그의 대답은 마리아는 그를 양육했을 뿐 그녀의 실체를 나누어 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 질문에 대한 칼빈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모든 더러움에서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우선 그가 남자와의 교합 없이 그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으며 또한 아담의 타락 이전의 상황과 같이 출생이 순결하고 오염되지 않도록 그는 성령에 의해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2.13.4) 칼빈은 그리스도의 죄 없음이 아담의 죄가 남자의 씨를 통해서만 전가되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거부한다. 칼빈은 마리아가 죄가 없다(죄 없는 잉태)라는 사실을 고수하지 않기 때문에 마리아가 처녀였다는 사실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이 아니다. 무흠잉태설은 1476년 교황 섹스투스 4세에 제정되었다. 죄의 전가가 성적 교합의 욕정과 연결될 수도 없다. 칼빈은 어거스틴과 같이 그리스도의 죄 없음은 성령의 은밀한 역사 때문이라 한다. 아담은 그리스도를 낳지 않았고 성령이 그리스도를 낳으셨다.
멘노시몬스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면 그는 흙으로 된 육체의 좁은 감옥 안에 갇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칼빈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은 그분이 하늘을 떠나지 않은 채 처녀의 몸에 태어나 십자가에 달리시기를 원했음을 의미한다. 즉 태초부터 그러했던 것처럼 그 분은(하늘에 계시면서) 계속해서 세상에 충만히 계셨다. 이처럼 그는 하늘에 있는 인자였다.(요3:13) 육체를 따라 인자로 이 땅에 계셨던 바로 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논리로 그 분의 신성을 따라 그곳으로 강림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신성이 육체의 감옥에 자신을 숨기기 위해 하늘을 떠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분이 비록 만물을 채우시지만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 그 분은 육체적으로 거하셨기 때문이다.(골2:9) 본성으로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방법으로 육체를 입으셨기 때문이다.(4.17.30)
이것은 칼세돈이 고백한 것 즉 빼기(substraction) 성육신이 아니라 더하기(addition) 성육신 신학이다. 그 분의 신성에 인성이 더해진 것이다. 그의 신성은 성육신의 결과 포기되거나 희석되지 않았다. 칼빈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인성과 결합, 연합되었다고 한다. 신성과 인성 모두 각자의 독특한 본성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그들은 하나의 그리스도를 형성한다.(2.14.1)
칼빈의 논점은 그리스도의 인성이 참된 것임을 주장한 것이다. 주림, 목마름, 추위, 육체의 연약, 자신을 천하고 멸시 받는 사람으로 드러내셨고 인간의 몸과 영혼을 받으셨다고 주장한다.(2.13.2) 요셉과 마리아를 통해 태어난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다.

2. 속성들의 교통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이 한 인격에 속할 수 있다면 한 본성의 속성들이 다른 본성과 교통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제기 된다. 이것은 칼빈주의와 루터주의자들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주제가 되었다. 특히 성만찬에서 그리스도 임재에 대한 논쟁에서 루터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체적으로 동시에 여러 장소에 임재할 수 있다고 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육체의 편재성을 주장한다. 성육신이 콤무니카치오(communication 교통)에 근거한다고 하는 루터주의자들이 인성이 신성에 대한 어떤 상응하는 교통도 없다는 뜻의 상호작용을 주장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리스도가 인간으로서만 중보자의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 이단자들의 견해에 반대해 칼빈은 그리스도의 인격적 통일성을 주장한다.
하나님의 아들이었던 그 분은 인간의 아들이 되었다. 이것은 본성의 혼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위격의 통일성을 통해서 이루어졌다.(2.14.1, 3)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가 행한 모든 행동들은 그리스도 위격 전체와 관련된 것이며 한 본성에만 개별적으로 국한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3. 하나의 위격, 두 개의 본성
이 신학은 칼세돈 신학을 따른 것이다.

이종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