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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2
그리스도의 구원사역I
요3:16-18, 사53:10-12
 

본문 : 요3:16-18, 사53:10-12

제11강 그리스도의 구원사역(Ⅰ)
(요3:16-18, 사53:10-12)


‘그가 자신을 주셨다’ 이 말의 의미하는 바를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아들의 뛰어남을 선포하는데 적합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바로 그 분이 우리의 속량을 위한 값으로 자신을 주신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부터 얻는 속죄, 죄씻김, 속죄의 배상(satisfaction)과 모든 유익이 ‘자신을 주셨다’는 이 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갈2:20)
그가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덧붙인 것을 ①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한 칭송이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과 효능을 충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②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유일한 값이다. 이 믿음의 교리가 교리들 가운데 최고다. 칼빈의 주석에서 인용한 이 두 구절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칼빈의 사상을 다룬다.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 강요 제2권 16, 17장을 설명하고 그와 관련된 주제들을 다루기도 한다.

Ⅰ. 그리스도가 대속주로서 구원을 성취한 방법, 그의 죽으심, 부활, 승천(16장)

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진노(2.16.1-4)
타락이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상태가 정죄받고 죽고 내버려진 것에 비추어 볼 때 세상의 유일한 대속주시요 구주이신 예수를 몹시 우리가 갈망하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히 예수를 주목하고 한순간이라도 놓쳐서는 안되는 이유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한눈을 파는 순간 그 분 안에만 있는 우리의 구원이 점차적으로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칼빈은 독자들이 예수의 구원사역을 생각하게 했다. ‘그가 우리를 위해 어떻게 구원을 성취하셨는가를 우리는 진지하게 여기서 생각해야 한다’ 내버려진바 된 죄인은 필사적으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게 할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을 열심히 찾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속죄적 배상(satisfaction)이 필요하다. 보통의 보증으로는 어림도 없다.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는 죄인들이 죄책에서 용서받지 않는 한 그들 위에 항상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의 가장 중요한 속죄의 주제, 곧 법률적, 형벌적 주제를 소개한다.
칼빈은 신학적 문제 곧 일종의 모순으로 보이는 문제를 제기한다.(2.16.2) 만일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어 자기의 아들을 우리의 구주로 보내셨다면 그의 아들 안에서 하나님이 화목되기 전까지는 우리와 원수가 되었다는 성경말씀은 무슨 의미인가. 칼빈은 하나님이 그의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 앞서 행하시고 자기의 유일하신 아들 안에서 우리를 향한 그의 사랑의 유일한 보증을 제공하셨다고 성경에 자주 선포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수들이요 저주 아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그러면 이 두 진리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고 황폐한가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진노와 원한과 영원한 죽음이 우리 위에 임해 있다는 것을 진술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긍휼 없이는 우리가 얼마나 불행했을 것인가를 거의 깨닫지 못했을 것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해방의 유익을 과소평가 했을 것이다.
칼빈은 조정(accommodation)을 말한다. 그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임해 있는 것을 결코 낮춰 표현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을 보내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죽게 하신 더 궁극적인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그는 조정의 개념(idea of accommodation)을 사용한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당하는 것이 참으로 마땅하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어 구원코자 우리의 대속주를 보내신 것이다. 우리의 화목에 앞서 그가 사랑을 베푸셨다. 우리가 잘 판단해야겠지만 하나님은 자기의 진노를 강조하시고 자기의 선행하는 사랑(precedent love)에 대해서 낮추어 말씀하셔야 했던 것이다.
요약하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먼저 압도되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로 감사함으로 영생을 취하고 붙잡을 리 없기 때문에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기를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적대적이시고 그의 손이 우리를 파멸시키시려고 무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또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부성애를 받아드리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악한 자를 정죄하는 것은 옳다 그렇지만 주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그의 것을 그 자신의 인애로 말미암아 잃지 않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사랑할 어떤 것을 여전히 찾으신다. 그는 우리를 죄인으로 적대하지만 여전히 그의 피조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에 대한 그의 순수하고 값없이 주시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납하여 은혜를 입히신다.(2.16.3)
그러나 그의 무한한 거룩성에 비추어 볼 때 어떻게 죄인들을 그가 용납하실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렇다. 죄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에 그의 아들의 속죄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부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화목을 먼저 준비하셨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기까지는 하나님의 분노를 당해 마땅한 불의가 우리 안에 남아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진노와 정죄를 당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와 연합시키는 때에 만이 우리가 하나님과 온전하고도 확실하게 연합될 수가 있다.
칼빈은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의 문제를 성경과 어거스틴의 글을 인용하여 거론했다.(2.16.4) 요약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실제로 임하지만 하나님의 본뜻은 아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이 창세전에 우리를 품어주신 사랑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엡1:4-5) 이 사랑은 어거스틴이 오래전에 말한 대로 신비롭다. “하나님의 사랑은 헤아릴 수 없고 불변하다. 이는 그의 아들의 피로 인하여 그에게 우리가 화목된 후에야 그가 우리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가 그의 유일하신 아들과 함께 그의 자녀들이 될 수 있게 하셨다.… 우리가 무엇이 되기도 전에… 그러므로 우리가 그를 향하여 원수 노릇하고 악을 행하던 때마저도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다. 이와 같이 그가 우리를 미워하시던 순간에도 놀라운 방식으로 그는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이다.

② 그리스도의 평생의 순종, 정죄받음, 십자가에 못 박힘, 죽으심 그리고 무덤에 묻히심 (2.16.5-7)
ⅰ) 칼빈은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를 위해 구원을 성취하셨는가를 논한다.(2.16.5) 그는 그의 순종의 전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 이것을 성취하셨다. 그가 종의 형체를 취하셨던 바로 그때부터 우리를 속량하기 위하여 구원의 값을 지불하기 시작하셨다.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죄 없는 삶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해서 칼빈은 십자가를 결코 훼손하지 않았다. 구원의 방법을 좀 더 정확하게 정의하면 성경은 특별히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인한 것으로 돌리고 있다.
칼빈은 소위 사도신경이 고백의 순서상 그리스도의 탄생, 죽으심, 부활로 이어진 것에 관심을 보였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기술함에 있어서 사도신경은 최선의 순서를 따랐다. 빌라도에게 정죄받음, 십자가에 못 박힘, 죽으심과 무덤에 묻히심, 지옥에 내려가심, 부활, 승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 재림의 순서가 그것이다. 사도신경 안에 성경의 순수한 증거들에 의해 확언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2.16.18)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고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는가? 이에 대해 칼빈은 힘주어 대답한다. 우리의 정죄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아무 종류의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아니했다. 우리의 속량을 대속하기 위해서는 그 분이 우리가 받는 정죄를 자신에게 전가하고 또 우리의 죄책을 자신이 지심으로써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는 그러한 종류의 죽음을 받으셔야 했다. 예수의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형벌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것이 율법적 형벌적 대속(Penal substitution)이다. 그리스도가 행악자의 역할을 맡으신 것은… 그가 죄인을 대신하여 죽기 위함이었다. 칼빈은 속죄적 배상(satisfaction)이라는 중요한 용어를 율법적 용어로 이해했다.
그리스도의 찬란한 무죄성이 강조됨으로 그는 자신의 죄가 아닌 다른 사람의 죄를 짊어진 것이 분명해 진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중요한 방식은 우리의 죄사면(acquittal)이다.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죄책이 하나님의 아들의 머리로 옮겨진 것이다.(사53:12) 이 대속을 기억하고 평생 두려움과 근심을 하지 않아야 한다. 아들이 스스로 짊어지신 하나님의 의로운 보복이 아직도 우리 위에 임해 있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종윤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