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종교개혁 502주년 종교개혁주일이다. 종교개혁은 1517년 마르틴 루터(M. Luther, 1483-1546)가 비텐베르크(Wittenberg)대학교회의 정문에 95개조의 토의 조항을 게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러나 어느 때부터인가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 (Protestant Church)들 중에는 ‘종교개혁’을 소홀히 여기는 교회들이 많아졌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 설교자들 가운데는 중세의 ‘면죄부’와 같은 ‘값싼 은혜’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많은 개신교회들이 오히려 종교개혁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언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종교개혁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는 돈을 주고 ‘면죄부’만 사면, 자신의 죄는 물론이고, 죽은 조상, 곧 부모님, 조부모 그리고 그 윗대의 조상 누구의 죄도 면제되어 하나님의 징벌과 심판을 면한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 결과 많은 평신도들은 ‘면죄부’만 사면, 회개할 필요도, 선행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이렇게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어진 ‘죄 사함의 은총을 돈으로 팔았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는 ‘95개조논제’ 제1항에서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 … ’(마 4:17)고 선포하셨을 때, 그 말씀은 신자들의 전 생애가 회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Dominus et magister noster Iesus Christus dicendo ‘Penitentiam(Mt 4,17) agite etc.’ omnem vitam fidelium petitentiam esse voluit.”
여기서 ‘fidelium penitentiam’이란, 신앙에서 우러나온 깊은 참회의 삶을 의미한다고 게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중세의 교황은, 모든 죄의 사면권(赦免權)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마 9:6, 이 밖에 여러 곳), 이 세상 물질(돈으)로 죄용서를 위하여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값싸게 팔았던 것이다. 그래서 루터는 그 당시의 설교자들을 향하여, “교황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부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있다”(제21항)고 선포하였다.
이와 유사하게 오늘날 한국 교회의 많은 설교들은 ‘회개의 선포가 없는 설교’, 오로지 ‘번영’, ‘일등’, ‘제일’, ‘축복’, ‘평안’, ‘큰 꿈’ 등의 수식어를 붙인 축복만을 선포함으로써 영생을 위한 십자가의 복음을 값싸고 천한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설교들은 많은 기독교 평신도들을 오직 ‘이 세상에서 평안하게 잘 먹고 잘살기 위한 기복(祈福) 종교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성도들의 깊은 회개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죄 용서가 없이는 참된 영적 평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안하다pax’, ‘평안하다pax’ 외치는 설교자들에 대하여 루터는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평안', '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겔13:10,16; 렘 6:14; 8:11; 살전 5:3)”(제92항)고 게시하였다.
반면에 루터는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crux, 십자가crux’하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그러나 사실 십자가는 없는 것이다.”(제93항)라고 게시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설교자에게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면죄부’ 하나로 심판받아야 마땅한 자신의 모든 죄를 ‘값싸게’ 용서받고자 하는 평신도 마음 역시, ‘면죄부’를 산 중세 가톨릭 교우들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 ‘면죄부’와 ‘값싼 은혜 선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회개’를 촉구하였던 루터의 설교를 경청하는 것은 종교개혁 정신을 본받는 길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종교개혁 주간을 지킨다는 것은 단지 지난 역사적 사실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때의 정황으로 오늘 우리의 신앙을 조명하여 우리 자신의 신앙생활을 개혁하는데 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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