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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2
코람데오(CORAM DEO)신앙을 회복케 하옵소서!
2020사명자대회 특별새벽기도회

제 1일
하나님을 만난 사람
(사 6:1-3)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시작은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 보다 온전해집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의 중요성은 그 자신의 신앙적 자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를 새롭게 하는 출발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구약 최고의 선지자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의 예언의 깊이와 기도의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일생은 흠 없는 선지자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탁월한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1장 1절에 의하면 그는 웃시야 시대 말기에 선지자 생활을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 시기에 웃시야 왕의 성전 제사 사건이 있었고 이 사건은 국가 사회 전체에 엄청난 혼란과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청년 선지자였던 이사야는 어떤 긍정적인 역할도 하지 못했고 오히려 역사 현장에서 은둔했습니다. 비겁했고 정의롭지 못했고 하나님께 충성되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변하게 된 것은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후 그는 전혀 새로운 사람처럼 성경에 등장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어떻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까요? 웃시야 왕은 16살에 유다 왕국의 제12대 왕으로 즉위하여 52년간 통치하며 국가를 든든하게 성장시킨 사람이었습니다(대하 26장).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 그를 하나님은 기이한 도우심으로 축복하셨습니다. 이사야는 이 시기에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이사야에게 웃시야는 너무나 든든한 후원자였고, 든든한 배경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쳐 웃시야는 이사야에게 우상적 존재로 변질되었고 그 웃시야가 부끄럽게 죽으면서 이사야에게도 정치적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위기는 이사야가 하나님을 찾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의지했던 세상의 모든 도움이 단절되고 그 자신의 생명마저 위기에 처했을 때 이사야는 비로소 성전으로 들어가 기도하기 시작했고 하나님만 붙드는 그에게 하나님을 뵙는 영광을 허락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만난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습니다. 이 모습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고의 존재임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님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습니다. 옷은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 역시 가장 존귀하신 분이심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찬송 받으시는 분이셨습니다. ‘거룩함’을 세 번 반복한 것은 가장 거룩하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을 만난 이후 이사야의 신앙은 획기적인 전환을 이루었습니다.

제 2일
자아인식의 은혜
(사 6:4-7 )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보는 눈이 어둡습니다. 자기를 바르게 아는 것은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너무나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자기 비참함을 모르고 하나님을 알면 인간은 오만해지고, 자기 비참함을 알고 하나님을 모르면 인간은 절망 한다’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난 후 자기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 첫째 모습은 ‘죄인 된 자기’입니다. 그는 5절에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라고 소리칩니다. 얼마나 죄가 많은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천 번 만 번을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존재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 처절한 발견은 진정한 참회를 수반하고 진정한 참회는 용서의 감격을 누리게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둘째로 발견한 자기는 ‘용서받은 자기’입니다. 이사야는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자기 죄인 됨을 철저히 깨닫고 고백하는 그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고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죄인 됨의 발견으로 자아인식이 그치게 되면 인생의 짐이 무겁고 삶은 고통스러우며 미래는 불안하고 절망감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우리를 용서하시는 은혜를 덧입고 하나님의 자녀로 확증된 자기를 발견해야 합니다. 셋째로 인식한 자기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받은 자기'였습니다. 8절에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이미 선지자였지만 다시 한 번 부르심을 확인하고 자기 사명의 엄숙함을 재확인하면서 자신이 가는 길을 재촉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서 사명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드셨을 때 존재의 목적 없이 만드시지 않으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존재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바르게 사는 사람입니다. 특히 우리는 이 시기에 우리를 이 교회에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목적이 있음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모든 자기 인식은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제 3일
향기로운 제물처럼
(롬12:1-2)


로마서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1-8장까지는 주로 교리적 내용을, 9-11장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특히 유대인의 영적 미래에 대한 바울의 설명입니다. 마지막으로 12-16장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라는 질문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되고 이 물음에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이 질문에 대한 명쾌한 원칙을 제시하는데 곧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입니다.
우리의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인간의 육신을 종교적 제물로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 몸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일상의 삶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고 제물이 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산 제물이라는 말씀은 레 1장의 번제물 규정을 연상하게 됩니다. 레 1장에서 드려진 번제물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했습니다. 즉 성도들의 삶이 향기로워야 몸으로 산제물 드리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번제물은 흠이 없는 제물들이어야 합니다. 제물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반드시 흠 없는 것이라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모든 것에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흠 있는 제물을 가져오는 백성들을 향해 ‘내 이름을 멸시하는 자들’이라며 책망했고 ‘차라리 성전 문을 닫으라’(말 1:6, 10)고 했습니다. 번제물은 전체를 드리는 제사입니다. 번제물은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리고 제물을 각을 뜬 후 제단에 올렸고 뼈와 내장과 심지어 내장의 기름까지 모두 제단에서 불태워 냄새와 연기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한 부분도 남는 것 없이 다 바치는 제물이 번제물입니다. 우리 삶은 교회 안에서의 삶이나 세상에서의 삶이나 모두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한 부분을 드림이 아니라 삶의 전체가 드려져야 향기로운 삶이라는 말씀입니다. 또 번제물은 예배 후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번제는 제물을 불태워 연기와 냄새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당연히 제사가 끝나면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자기를 바치는 사람은 자기 흔적을 남기려 안간힘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심는 자와 물주는 이가 모두 아무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제 4일
좋은 교회를 만드는 일꾼들
(행 13:1-3)


우리 모두의 평생의 소원은 우리 교회가 더 좋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위한 기도를 단 하루도 쉬어 본 일이 없이 평생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교회가 더 좋은 교회 되는 일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습니까? 마음은 진실하고 기도는 간절했으나 육신이 약했습니다.
좋은 교회란 어떤 교회입니까? 히브리어에 좋다는 말은 TOV입니다. 이 말은 보기에 좋다 즉, 아름답다는 의미와 선하다는 도덕적 의미와 기능이 탁월하다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좋은 교회는 이런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디옥 교회는 참 좋은 교회였고 모든 교회의 모델이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현대적 용어로 ‘기독교의 세계화’에 도전하여 그 성과를 거두어 낸 교회였습니다. S. Nill은 그의 교리사 연구에서 ‘안디옥교회의 선교사들이 안디옥을 출발할 때 세계사의 중심축이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교회 역사는 물론이고 세계 문명사에도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말씀 중심의 내부 사역이었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 그 기초가 튼튼해야 합니다. 그 기초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행 11:26에 의하면 안디옥 교회의 첫 사역은 사도들이 ‘큰 무리를 가르치는 일’이었습니다. 안디옥교회에는 ‘선지자와 교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안디옥 교회의 영적인 내적 능력을 극대화 시켰습니다. 두 번째로 안디옥교회는 일치와 연합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를 때 이미 전 세계의 모든 교회는 한 몸임을 전제했습니다.
1절에는 안디옥 교회를 섬긴 사역자 다섯 분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이 보낸 공식 지도자였으나 다른 지도자들을 세워 함께 동역했던 열린 마음의 지도자였습니다.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은 그 이름이 흑인임을 의미합니다. 구레네 사람 루기오는 아프리카 태생의 로마 노예였습니다. 헤롯의 젖 동생 마나엔은 헤롯 가문의 후손이었지만 4대에 걸친 악연의 사슬을 끊어내고 교회는 그를 영접했습니다. 사울은 한때 극렬한 박해자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걸 용서하고 그를 지도자로 모셨고 선교사로 파송하여 평생 물질과 기도로 후원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십자가 사랑으로 연합하여 헌신하므로 세상 역사를 바꿨습니다. 세 번째로 안디옥 교회에는 영적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금식하며 기도하고 헌신’했습니다.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고 기도하며 금식하는 영적 열정을 통해 안디옥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제 5일
위기를 극복하는 지도력
(창 41:37-43)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시대를 섬겨 바르게 인도해야 할 사명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할 신분임을 가르쳐 줍니다. 요셉은 17살에 노예로 팔려갔고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바로를 만났고 그의 선택으로 일약 애굽의 총리가 되어 그 후 80년을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요셉은 30세에 총리가 되는 행운을 얻으므로 지금까지의 고생이 끝나고 새로운 행복의 시대가 개막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의 생애에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무런 준비 없이 너무 큰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또한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심각한 국가적 재난의 문제였습니다. 7년의 흉년은 단순히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닌 전 아프리카 대륙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이 일은 매우 복잡한 정치적 위기와도 관련이 있었습니다.
요셉은 한 시대의 국가적 위기를 극복할 객관적 능력은 없었지만 반면 큰 장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를 신뢰하고 좋아하였습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신뢰감을 주었고 성실했습니다. 또 그에게는 포용력이 있었습니다. 훗날 총리가 되고 형제들을 만났을 때에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두려움에 빠진 형제들을 위로하고 포용했습니다. 자기를 감옥에 보낸 보디발의 아내의 죄도 들추지 않았습니다.
요셉의 이런 인격은 어디서 오는 것입니까? 그와 같은 인격적 능력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인격적 부족함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대의 지성적 수준과 경제 능력이 향상되면 자연스럽게 개인의 인격적 성숙도도 자라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앞 세대보다 더 많이 배웠고 더 많이 가졌지만 더 인격적입니까?
바로 왕은 요셉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 없는 그가 보기에도 요셉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이 아니면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요셉을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될 때 우리도 위기극복의 지도력을 보일 수 있습니다.



제 6일
성령충만 하십니까?
(행 2:1-4)


세계 교회는 다양한 나라, 다양한 민족과 문화 그리고 많은 교파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러 교파나 국적을 불문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필수 요소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성령 충만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자주 성령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교회 질서를 무시하거나 그릇된 신비주의를 조장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케 한 일이 많았습니다만 예수님은 항상 믿는 자들이 성령 충만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요 16:7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당신이 떠나시고 성령께서 오심이 제자들에게 더 유익한 일이라고 하실 만큼 예수님은 성령을 중요하게 여기셨습니다.
1) 성령님은 바른 믿음을 가지게 하십니다. 성령이 오시자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님에 대한 바른 확신이 갖게 됩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성령의 감동을 받음으로 바른 신앙고백이 가능하게 됩니다.
2) 성령님은 우리를 성결케 하십니다. 성도들과 교회의 능력은 경건과 성결에 있습니다. 우리가 성결케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 안에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채워져야 합니다. 성령은 성결의 영이십니다.
3) 성령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부여하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행 1:8 이 권능을 dunamis 즉 dynamite라고 합니다. 폭발하는 능력입니다. 이 성령의 능력으로 초기 교회가 유대주의, 헬라철학과 종교 그리고 로마의 군사와 정치권력을 넘어서는 선교적 역량을 나타낼 수 있었고 오늘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능력을 얻게 합니다.
4) 어떻게 성령 충만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성령 충만은 영적 흥분상태가 아니라 우리가 인격적으로 그분께 굴복하고 자신을 드리는 현상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회개할 때, 말씀 들을 때, 기도할 때,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행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일상의 생활을 회개, 말씀묵상, 기도, 순종으로 이어갈 때 한순간의 현상이 아닌 일상의 현상으로 성령께서 늘 함께 하실 것입니다. 항상 성령 충만하심으로 영적으로 높은 차원의 삶을 살아가시는 서울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리 : 허숙 권사 사진촬영 : 유은경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