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소개
서울교회 소개
서울교회의 철학
서울교회가 있기까지
주요활동
교회 오시는 길
교역자/장로
원로목사 소개
- 이종윤 목사
- 설교와 신학
- 경력/교회개척
- 저서/논문
- 동정
위임목사 소개
교역자 소개
장로 소개
선교사 소개
예배 안내
예배 및 집회시간 안내
교회 소식
교회행사/소식
모임/교인소식
주간기도
순례자 컬럼
언론에 비친 서울교회
Home > 교회소식 > 컬럼
2021-05-23
우리말 성경의 역사 5
천국시민 양성 - 신앙강좌반

구역(舊譯)성경 - 최초의 공식적인 번역 성경


<한글 사용>
·1443 세종대왕 한글 창제
·1446 세종대왕 한글 반포
·1896 독립신문 (처음 한글 전용)
·1906 이인직 '혈의 누' ,'귀의 성' (한글 사용했으나 한자어를 음독함)
·1908 최남선 '해에게서 소년에게' (한글로만 시를 씀)
·1918 이광수 '무정' (순수한 우리말의 어휘와 표기, 처음 대중적으로)
* 한글 사용에서 우리말 성경은 사회를 훨씬 앞서 있었다.

우리말 성경이 번역된 역사의 초창기는 개인 역 시대라고 할 수 있다. 1882년 로스 번역을 시작으로 이수정 번역도 개인 번역이었다. 국내에 들어온 선교사들은 우리말 성경이 필요했다. 1887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수정 본의 수정본인 <마가의젼한복음셔언해>를 내놓았다.
이후에도 1890년 아펜젤러 <보라달로마인셔>, 1891년 펜윅 <요한복음젼>, 1892년 아펜젤러 <마태복음젼>, 게일 <사도행젼>, 1893년 펜윅 <약한의 긔록한대로복음(요한복음)>의 개인 번역으로 이어졌다.
다음 시기는 발전기로서 위원회 역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초창기 선교사들은 조선에 하나의 교단을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바람은 결렬되고 말았다. 결렬된 후 선교사들은 조선에서의 선교가 교단별로 이루어질 텐데, 그렇다면 모든 교단이 한양에만 선교를 집중하게 될 것을 우려했다.
그래서 조선을 네 지역으로 구분한 후 각자 맡은 지역으로 흩어질 것을 합의하였다. 미국 북장로교는 평양을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을, 캐나다 장로교는 동북지역, 미국 남장로교는 호남지역, 호주 장로교는 영남지역을 맡게 되었다. 조선에 하나의 교단을 세우려는 노력이 실패한 후, 선교사들은 교단을 불문하고 성경만큼은 반드시 하나여야 한다고 공감하여 1887년 2월 7일 “조선어 성경번역위원회”를 결성한다. 이는 현재의 “대한성서공회”의 전신으로 지금까지 유일한 공식기관이다.
조선어 성경번역위원회는 성경 번역 작업에 매진하였고, 결국 1900년 신약성경 전체를 번역 완료하여 <신약젼셔>를 출간하였다. 이것은 로스역 <예수셩교젼셔>(1887) 이후 두 번째 신약의 완역본이자, 최초의 공식 번역이다.
곧이어 1900년부터 구약성경 번역 작업에 착수하였다. 번역 작업은 많은 수고와 희생을 동반한 지난한 작업이었다. 1902년 6월 성경 번역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목포로 가던 아펜젤러가 순교하기도 했다. 그리고 언더우드, 게일, 레널즈는 1902년 10월부터 1906년 3월까지 모두 555회의 모임을 가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결국 1910년 4월 구약 전체가 번역 완료되었고, 이것은 이미 번역 완료된 신약과 합쳐져서 이듬해인 1911년 3월 <성경젼셔>로 출간되었다. <성경젼셔>는 출간되자마자 <구역(舊譯)>으로 지칭되었다.
<성경젼셔>가 번역 면에서 볼 때 미비한 점들이 많아서 이를 개정하는 작업이 곧 시작되었는데, 개정 작업에서 <성경젼셔>를 <구역(舊譯)>으로 지칭하는 것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경 번역의 초창기와 발전기에는 기독교가 한글 사용에 있어서 사회를 훨씬 앞서 있었고, 서민들에게 쉬운 한글이 대중적으로 보급되는데 선구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초기 천주교는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았다. 당시는 한글을 천시하던 분위기였고, 주로 양반 중심이었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한문성경을 읽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에 성경을 우리말로 번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요약정리: 김애리 집사(편집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