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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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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강 : 사도신경 - 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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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1차 집단일까요, 2차 집단일까요?
1차 집단과 2차 집단의 특징에 대해 알고 계신가요? 사회집단은 1차적 집단과 2차적 집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차 집단은 생득집단이라고도 하며, 부모와 자녀의 관계, 형제와의 관계처럼 선택의 여지 없이 태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맺어진 관계를 말합니다. 혈연과 지연으로 이루어진 소규모의 친밀한 사람들의 집단은 대체로 1차적 집단으로 분류됩니다. 반면 2차 집단은 이익집단이라고도 하며, 인간관계가 부분적이고 공식적으로 맺어진 사람들로 구성된 집단을 의미합니다. 2차적 집단에서는 사람들이 특정한 이익이나 목적을 위해 서로 관계를 맺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1차 집단일까요, 2차 집단일까요? 1차 집단이 생득집단이라고 하지만, '1차적'이라는 의미가 사람의 사회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집단이라는 뜻과 가장 친밀한 유대관계와 소속감을 줄 수 있는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한다면, 이상적인 교회의 모습은 1차 집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과 더불어 교회에 대한 중요한 말씀으로 언급되는 것 중 하나는 에베소서 5:25절입니다. 이 구절이 중요한 이유는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잘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5장 25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사도 바울은 주님과 교회와의 관계를 부부 관계에 비유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처럼 부부가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셨을까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달리도록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으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즉, 주님께서는 저를 위해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형제와 자매를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교회를 사랑하셨기에, 주님의 사랑의 의미를 아는 사도 요한은 늘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여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55문 : "성도의 교제"를 당신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첫째, 신자는 모두 또한 각각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주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의 모든 부요와 은사에 참여합니다. 둘째, 각 신자는 자기의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복을 위하여 기꺼이 그리고 즐거이 사용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에서는 성도의 교제를 대상과 역할에 따라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모든 부요와 은사에 참여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각 신자가 가진 은사를 다른 지체의 유익과 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받아서 주는 것, 즉 유통입니다. 우리가 성도의 교제라고 할 때 그 대상을 동료 그리스도인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현재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함께 예배드리는 사람들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제의 대상과 범위를 확장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 범위에 있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성도들과의 교제이고,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교제입니다.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 모여 교제를 나누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성도들의 교제라면, 눈에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교제는 같은 시간 같은 장소가 아니더라도 성령 안에서, 그리고 기독교 역사와 전통 안에서 교제하는 것을 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도들의 교제는 시간적 범위를 무한대로 확장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12장은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 언급하는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은 기독교 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믿음의 선배들, 믿음의 동역자들을 의미합니다. 그 믿음의 선배들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고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어떤 영광을 누리고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북돋아 준다는 점에서 여전히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교제를 나누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정 리
크든 작든, 나에게 도움이 되든 되지 않든, 필요성을 느끼든 못 느끼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공동체에 속해 있습니다. 이를 아는 것이 성도의 교제를 이해하는 첫걸음입니다. 교제는 혼자서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는 것,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교제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중고등 사회 과목 교과서에 언급된 용어를 사용하자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학습이라는 사회화 과정을 거쳐 공동체에 적응하고 공동체의 가치를 내면화하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확립하고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며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교회 안에서 교회 식구들과 교회 예산으로 먹고 놀고 즐기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교제, 성도의 교제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고 또 성장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이른바 "학습과 사회화"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장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성장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할 때, 전제 조건은 예수 안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신앙 공동체가 본질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그 공동체 안에서 성도의 교제가 진실하게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빌립보서 2장 5절과 11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공동체 안에서 온전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먼저 성령 안에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게 하시고, 교회의 하나 됨에 동참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를 받고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다면 이제 성장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물론 성장에는 고통, 곧 성장통이 따릅니다. 성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해야 할 일이 많아지고 책임질 일이 많아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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