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만찬의 해석이 교파마다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교파적 배경이나 학문적 여정에 따라 그리고 그 해석자가 현재 속해 있는 신앙공동체에 따라 성경 본문이 전혀 다르게 해석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고 포도주를 나누어 주실 때 말씀하신 내용, 곧 성만찬 제정의 말씀을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성만찬 제정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떡과 포도주를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사제의 권능을 강화했다면, 츠빙글리는 상징적으로 해석하면서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기억나게 만드는 제의(ritual)임을 강조하였고, 칼뱅은 영적으로 해석하면서 성령의 임재 및 그리스도와 하나 됨을 강조하였습니다.
로마 가톨릭은 12세기에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공식적인 교리로 확립했습니다. 이에 반대한 루터는 주님의 몸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 그리스도께서 실제적으로 성만찬의 공간에 임재하신다고 하는 공재설을 주장했습니다.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츠빙글리는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기념설을 주장했고, 제네바에서 종교개혁을 진행하던 칼뱅은 성만찬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임재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은 화체설을 공식적인 교리로 확립하는 과정에서 미사에 참여하여 성만찬의 떡을 받아먹지 못하면 구원의 은총에서 끊어진다고 가르쳤습니다. 구원의 은혜가 주입되는 통로인 미사에 참여하여 성만찬의 떡에 참여하지 못하면 구원의 은총에서 떨어진다고 가르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79문 : 그렇다면 왜 그리스도는 떡을 그의 몸이라고 하시고, 잔을 그의 피 혹은 그의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또한 바울 사도도 왜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말합니까?
답 :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데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치 떡과 포도주가 육신의 생명을 유지시키듯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의 몸과 흘리신 피가 우리 영혼을 영생으로 이끄는 참된 양식과 음료라는 사실을 가르치려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께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이러한 표와 보증으로써 우리에게 다음을 확신시키려 하셨습니다. 첫째, 우리가 그리스도를 기념하면서 이 거룩한 표들을 육신의 입으로 받아 먹는 것처럼 실제로, 성령의 역사에 의해 우리가 그의 참된 몸과 피에 참여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모든 고난과 순종이 확실하게 우리의 것이 되어, 마치 우리 자신이 직접 모든 고난을 당하고 우리의 죗값을 하나님께 치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은 내 몸이다 이것은 내 피다”라고 말씀하실 때, 그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맥락을 같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는 유월절 식탁으로 준비되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노예 생활에서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출애굽하기 직전에 열 번째 재앙에서 구원해 주셨음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자리였습니다. 열 번째 재앙은 마지막 재앙인 장자들의 죽음인데,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집은 그 재앙이 “넘어갔다”는 의미에서 넘을 유(逾)와 건널 월(越) 자를 써서 “유월절”이라고 합니다. 어린 양의 피가 구원과 연결되어 있지만, 피를 먹지 않고 고기를 먹는 것은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신 12:23)”는 말씀 때문입니다. 마치 양고기를 먹음으로써 유월절 당시의 어린 양의 피가 생명을 구원받는 방법이 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집을 넘어가셨던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처럼, 떡과 포도주를 먹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생명을 구원하는 방법이 되었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도록 하셨습니다.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에 참여한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얻은 구원의 은혜를 맛본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80문 : 주의 만찬과 로마 교회의 미사는 어떻게 다릅니까?
답 : 주의 만찬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 위에서 이르신 유일한 제사에 의해 우리의 모든 죄가 완전히 사해졌음을 확증합니다. 둘째, 성령에 의해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으며 그의 참된 몸은 지금 하늘에 있고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의 경배를 받으심을 확증합니다. 그러나 미사는 첫째, 그리스도가 산 자들이나 죽은 자들을 위해서 사제들에 의해 지금도 매일 드려지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의해서는 그들이 죄 사함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칩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떡과 포도주의 형체 속에서 몸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 속에서 경배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미사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의 제사와 고난을 부인하는 것이며 저주받을 우상숭배입니다.
주의 만찬과 로마 가톨릭의 미사는 모두 ‘구원의 신비와 비밀’을 맛보는 자리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례의 핵심이라고 할 때, 모든 전통이 성례로 인정하는 성만찬을 예로들어 기념설, 영적임재설, 화체설은 각각 ‘구원의 신비와 비밀을’ 어떤 방식으로 설명하는지 구분하여 표현해 보는 것도 성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구원의 신비와 비밀을 ‘기억’하게 또는 ‘생각나게’하는 의식으로서 성례와, ‘경험’하게 하는 의식으로서의 성례, ‘주입’하는 의식으로서의 성례로 구분할 때, 매개체인 떡과 포도주를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문제에 있어 근본적인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제의 역할이라는 점에서도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적임재설에 따르면, 성례에서 떡과 포도주라는 구원의 신비와 비밀의 매개체를 먹고 마실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으로 임재하셔서 구원의 신비와 비밀을 직접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때 경험의 주체는 성례 참여자이며, 경험의 대상은 성례의 물질적 요소인 떡과 포도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 과연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단순히 떡과 포도주라는 물질에 국한되는가, 아니면 이 물질과 함께 구원의 신비와 비밀도 함께 경험하는가? 만약 전자라면, 구원의 신비와 비밀은 단순한 기억이나 상기의 대상이 되어 기념설의 범주에 머무르게 됩니다. 반면 영적임재설은 후자의 입장을 취합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으로 임재하심으로써 떡과 포도주뿐 아니라 구원의 신비와 비밀까지도 함께 경험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집례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로마 가톨릭은 이러한 구원의 신비를 경험하는 방식을 다르게 설명합니다. 집례하는 사제가 기도할 때 떡이 그리스도의 살로,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권능은 사제가 서품을 받을 때 주교로부터 전해받은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통해 사제의 권한을 강화했습니다. 나아가 사제는 떡과 포도주를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능력뿐 아니라, 수찬정지를 통해 신자들을 구원의 은총에서 제외시킬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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