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교회사]10강: 십자군 전쟁의 진행과 종결

관리자
2025-04-27

중세교회사 10강: 십자군전쟁의 진행과 종결

 

1. 서론적 질문: 거룩한 전쟁이 있을 수 있을까?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는 구호 아래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며 한 편으로는 성공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약 200년간 총 8차, 혹은 9차에 이르는 십자군 원정이 이어졌고, 그 긴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하나의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거룩한 전쟁(Holy War)이 존재할 수 있을까요?”

  일부는 이렇게 반문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전쟁이 거룩한 전쟁이 아니냐?” 실제로 모세오경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수행한 수많은 전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민수기 21장 14절에는 ‘여호와의 전쟁의 책’이라는 표현도 등장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복은 단지 정복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일부였으며, 그로 인해 전쟁 자체는 종교적이고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질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모두 ‘거룩한 일’인가요? 이 질문은 중세 유럽의 가장 극적인 신앙 운동, 십자군 전쟁을 마주할 때 더욱 심각해집니다. 예루살렘, 곧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의 현장을 되찾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집과 고향,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 생업과 신앙 공동체를 떠났고, ‘Deus vult’라는 외침이 유럽 전역을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침 아래 벌어진 일들은 무엇이었을까요? 피로 물든 성지, 약탈과 학살, 심지어 (다른 종교가 아닌) 다른 신앙을 가졌다는 이유로 자행된 배척과 혐오 등 이었습니다.

  우리는 묻게 됩니다.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었을까?" 혹시 신의 이름은 인간의 욕망과 정복의 야망을 정당화하는 방패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 질문은 단지 과거를 향한 회고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신앙의 물음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도 세계 곳곳에서는 ‘신의 이름’으로 전쟁이 벌어지고, ‘정당한 분노’와 ‘거룩한 목적’을 내세운 갈등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군 전쟁이라는 과거의 이야기를 단순한 역사적 사건으로 넘길 수 없습니다. 그 전쟁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었는지를 묻는 순간, 우리는 동시에 오늘의 신앙, 공동체, 그리고 ‘평화를 향한 태도’를 성찰하게 됩니다.


2. 반복된 십자군 전쟁: 실패와 회의 속에 울려 퍼진 구호, "Deus vult"

  1099년, 제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라틴 왕국을 세우는 데 성공했습니다. 유럽 전역은 이를 '성지 회복의 영광'이라 여겼지만, 이슬람 세계는 그것을 '이교도의 침입'으로 간주했습니다. 그 결과, 십자군 전쟁은 단발적인 군사 원정이 아닌,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 간의 200년에 걸친 반복된 충돌, 이른바 '신의 이름으로 벌어진 전쟁'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제2차 십자군 (1147-1149): 신의 뜻인가, 인간의 착각인가?

  1144년, 라틴 왕국의 북쪽 방어선이자 전략적 요충지였던 에데사 백국이 이슬람 세력에 의해 함락됩니다. 이는 중세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십자군 재소집의 명분이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 등 유럽의 주요 군주들이 직접 원정에 나섰지만, 이들은 내부 불화, 비잔틴과의 불신, 보급 문제 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쟁은 십자군 역사상 첫 '실패'로 기록되었고, 'Deus vult'라는 구호는 더 이상 무조건적인 신뢰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의 열정만으로 전쟁이 이길 수 없음을 보여준 이 사건은 유럽 내에서도 회의와 비판의 목소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제3차 십자군 (1189-1192): 영웅들의 등장, 그러나 절반의 성공

 1187년, 살라딘(Saladin)은 히틴 전투에서 십자군을 크게 무찌르고 예루살렘을 탈환합니다. 이에 분노한 유럽은 '왕들의 십자군(Kings' Crusade)'이라 불리는 제3차 십자군을 조직합니다.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사자심왕'), 프랑스의 필립 2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등 유럽의 강력한 왕들이 직접 참여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리처드와 살라딘 사이의 협상 끝에 순례자의 예루살렘 출입만을 허용받는 데 그쳤고, 도시는 되찾지 못했습니다. 이 전쟁은 종교적 열정보다 정치적 현실이 우선되었음을 보여주며, 십자군 운동의 이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드러냅니다.

  제4차 십자군 (1202-1204): 성지 대신 성전을 약탈하다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전쟁이 바로 제4차 십자군입니다. 당초 목표는 이집트를 거점으로 한 이슬람 세력의 제거였지만, 군자금과 병력 부족으로 인해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과 거래를 맺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십자군은 비잔틴 제국의 황위 계승 분쟁에 휘말리고, 결국 성지 예루살렘 대신 기독교 동방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하는 비극적 결과를 낳습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에 의해 불태워졌고, 동서 교회 간의 간극은 걷잡을 수 없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쟁은 더 이상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구호로는 정당화할 수 없는, 신앙이 돈과 권력에 의해 왜곡된 사례로 기억됩니다.

  그 이후의 십자군 (제5차~제9차): 점점 흐려진 명분

  제5차 십자군 (1217-1221): 이집트를 공략하려 했지만 실패. 나일강 범람과 이슬람의 저지로 후퇴.

  제6차 십자군 (1228-1229):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2세가 외교를 통해 예루살렘을 일시적으로 확보. 그러나 무혈 입성이었기에 교황의 인정은 받지 못함.

  제7차 십자군 (1248-1254): 프랑스 루이 9세의 원정. 이집트 침공 실패, 포로가 됨. 큰 피해만 입음.

   제8차 십자군 (1270): 다시 아프리카 튀니스 공략, 루이 9세가 병사하면서 종료.

  제9차 십자군 (1271-1272): 잉글랜드 왕자 에드워드(후의 에드워드 1세)가 이끄는 소규모 원정. 큰 전과 없이 종료.

  이후 1291년, 아크레(Acre)가 이슬람에게 함락되며,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마저 사라집니다. 이것으로 십자군 시대는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은 되찾지 못했고, 교회는 더 깊이 갈라졌으며, 기독교와 이슬람 세계는 이전보다 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수많은 인명 피해, 약탈, 정치적 혼란을 남긴 채 이어진 전쟁들은 과연 무엇을 이루었는가? 거룩함의 이름으로 반복된 이 전쟁의 역사는, 우리에게 다시 묻게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었는가?" 혹은 그것은 인간의 고집스러운 집착, 그리고 정치적 욕망에 '하나님의 뜻'이라는 옷을 입힌 것이 아니었는가? 이 질문은 단지 역사적 회고에 그치지 않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종교, 민족, 이념의 이름으로 분쟁이 계속되는 현실 속에서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3. 십자군 전쟁의 영향과 역사적 성찰

  1) 교회와 교황권의 변화

  십자군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라 불렸지만, 실상은 종교의 옷을 입은 정치적ᄋ군사적 전쟁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죄악들 가운데 하나였으며, 교황권의 정점과 그 한계를 동시에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교황권 강화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지만, 교회는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돌보는 공동체가 아니라, 초국가적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ᄋ군사 기구로 변모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의 반복과 실패, 그로 인한 무수한 희생은 결국 교황권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습니다. 특히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약탈한 사건은 동방 정교회와의 화해 가능성을 끊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의 실체를 여실히 드러냈습니다. 이 사건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심화시켰으며,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는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서방 세계에서는 이 전쟁을 통해 유럽이 교황을 중심으로 결집된 하나의 기독교 문명권이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2) 유럽 사회와 경제의 변화

  역설적이게도, 십자군 전쟁은 중세 유럽의 봉건 질서를 해체하고 새로운 상업경제로의 전환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토지 중심의 봉건제는 점차 화폐와 생산물 중심의 시장경제로 전환되었고, 십자군 원정을 위한 군수경제와 그에 따른 교역로의 확장은 유럽 내 경제의 역동성을 키웠습니다. 특히 베네치아, 제노바와 같은 해상 무역도시들이 중계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도시 중심의 상업 질서가 강화됩니다.

  또한 이슬람 문명, 비잔틴 문화, 고대 헬레니즘의 유산과의 접촉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었고, 이는 르네상스의 사상적 기반으로 이어졌습니다. 십자군은 신앙의 이름으로 출발했지만, 그 여정에서 학문과 기술, 문화와 사상이 유입되며, 유럽은 외부 세계에 눈을 뜨는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3) 신학적 질문: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구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십자군은 '거룩한 전쟁'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해 신학적 질문을 제기하게 했습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교황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는 확신 속에서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 결과는 예루살렘의 영구적 확보도 아니었고, 복음의 확장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과 복음의 왜곡이었습니다.

  이후 종교개혁자들과 근대 신학자들은 '폭력과 신앙'의 관계를 재정립하려는 시도를 이어갑니다. "신의 이름으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종교적 신념이 다른 이의 생명과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말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물음입니다. 이는 민족주의적 종교 열정, 종교적 극단주의, 교회 내 권력 구조, 신앙의 공공성과 영성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4. 결론적 진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

 

  십자군 전쟁은 "하나님이 원하신다(Deus vult)"는 외침 아래 시작되었지만, 역사의 심판 앞에서 우리는 다시 묻게 됩니다. 과연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신 일이었을까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과 약탈, 학살은 그 어떤 신학적 미사여구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중세 교회의 역사를 공부하고 십자군을 다시 기억하는 이유는 단지 과거의 오류를 기록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이는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 얼마나 깊은 책임감과 분별력을 가져야 하는지를 성찰하기 위함입니다.

  십자군 전쟁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한 폭력이 어떻게 역사의 비극으로 남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교훈입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거룩함'이라는 개념을 얼마나 조심스럽고 깊이 있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일깨우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거룩함은 폭력을 정당화하는 방패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 평화와 화해를 위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말이 어떤 맥락과 태도로 사용되어야 하는지를 깊이 성찰해야 합니다. 교회의 사명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며, 복음의 승리는 전쟁터가 아닌 용서와 화해의 자리에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 그 뜻이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았는지를 묻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해 승리의 깃발을 들기보다,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눈물 흘리셨던 예수님의 마음. 그 눈물 속에, 진정한 거룩함이 있고, 참된 신앙의 길이 있습니다.